[고대권의 생글센글] 가족 같은 직장? 일과 가정의 조화가 먼저다

입력 2017-08-08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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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과 가족, 적당한 거리감이 서로에게 유익하다

“아들 같아서 그랬다.”

“딸 같고 대견해서 그랬다.”

병영 갑질 사건의 당사자는 사병에게 부과된 책임 이상의 일을 아무런 근거 없이 시켰다. 그 이유는 아들 같아서다. 외국에서 한국을 대표하고 있는 대사관에서는 종종 힘없는 여성 인턴이나 비정규직이 성희롱을 당한다. 가해자는 딸 같아서 그랬다고 한다. 두 사건의 본질은 뚜렷하다. 권력관계의 우위를 점한 자가 그 권력을 남용한 것이다. 언제부터 가족이 권력을 남용하는, 왜곡된 문화의 알리바이가 되었나?

가족이 왜곡되는 사례는 또 있다. 친하게 지내면서 일을 잘 하면 될 관계의 사람들이 모여서 술 한두 잔을 마신다. 갑자기 반말이 나오더니 앞으로 형이라고 부르란다. 부지불식간에 생긴 이 새 식구는 불편하다. 같은 직장에서도 불편한데, 거래처 관계에서는 더 불편하다. 상호 간에 존칭은 수평적인 관계의 기본이다. 말이 풀리는 순간 일의 긴장감도 풀린다. 관계는 꼬이고, 가끔은 사적인 자리에서도 지켜야 할 공적 관계의 벽이 무너진다. 가족을 사칭하지만 가족은 아니기에, 가족이라면 지켜줄 것 같은 진심도 찾아보기 힘들다. 비윤리적인 청탁이 오고 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직장이 가족 같을 필요가 있을까? 직장은 구성원 간의 계약에 의해 구성되었고, 그 계약의 효력 내에서 서로 간의 책임을 나누는 곳이다. 직장이 외부의 직장과 협업을 할 때도, 이 관계는 계약의 효력과 범위 내에서 보호를 받는다. 서로의 일을 잘 하고, 이 협력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 된다. 꼭 가족이어야 책임을 지거나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 같은 직장 문화의 장점도 있겠지만, 이 장점은 아슬아슬하다. 직장이 가족을 사칭하는 사이, 진짜 가정은 직장의 배려를 받지 못하고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가장 고달픈 것은 워킹맘이다. 아침 일찍 어린이집 원장 눈치를 보며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직장에 오면, 가족 같은 직장의 누군가는 출근 시간보다 일찍 와서 업무 준비를 하는 게 프로의 자세라며 말을 툭 던지고 사라진다. 아픈 아이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나지만 꾹 참고 일을 하는데, 가족 같은 직장의 누군가는 요즘 일에 집중을 못한다고 추궁이다. 아이가 있기 때문에 집을 비우려면 온 가족이 일정을 조정하고 상의를 해야 하는데, 가족 직장은 예정에도 없던 출장을 지시한다.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제 때에 찾아오지 않으면 어린이집 눈치도 보이고, 아이가 혼자 남아 쓸쓸하게 엄마를 찾는데도 정시에 퇴근하려면 가족 같은 직장의 눈치를 봐야 한다.

워킹대디는 아예 집에 가족이 있다는 걸 인정을 못 받는 분위기다. 처갓집과 식사 약속을 할 때도 몇주전에 미리 약속을 하는 판인데, 오후에 갑자기 회식이나 하자, 술이나 한 잔 하자는 가족 같은 상사는 어디에나 있다. 총각 때는 야근이고 출장이고 열심히 하더니 결혼하더니 생각보다 가정적이네 라는 가족 같은 상사의 얘기는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다. 한 번도 존경해본 적 없는 상사가 자기는 결혼 초반부터 와이프 길을 잘 들여서 아무리 늦게 와도 집에서 타박을 않는다고 자랑할 때는 영혼 없는 대답을 하는 것조차 피곤하다. 아이를 위해 육아휴직을 써보려고 하면, 별종 취급을 받는다. 아이들의 학교 활동에 참여해보려고 하면 구구절절이 설명을 해야 한다. 설명은 왜 엄마가 안 가고 아빠가 가는지부터 시작된다. 아이를 찾으러 어린이집에 가봐야 한다고 나설 때도 역시 설명을 해야 한다. 왜 엄마가 안 가고 아빠가 가는지. 가족 같은 직장에서 내 가정의 성 역할과 부모로서 나의 기대감과 계획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구차하다. 왜냐하면 가족 같은 직장은 내 가정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가족에게 쏟아 붓는 것 같은 애정과 열정, 혹은 그 이상을 직장에도 쏟아 붓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이런 플롯들이 아직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업무의 생산성도 떨어지고, 가정의 사회적 기능도 위협받는, 그 누구에게도 좋지 않은 상황이 왜인지 반복되고 있다. 최근 주목 받고 있는 일과 삶의 조화(Work and Life Balance)는 제도와 문화 모두의 변화를 요구한다. 물론 직장과 삶의 일체감이 강했던 시기의 문화를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일과 삶을 조화시키는 작업의 핵심은 일과 삶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거리감을 만드는 것이다. 각 기업의 경영진이 먼저 나서서 강력하게 일과 삶을 조화시키는 행동을 보여주고 그 실적을 관리해야 한다. 시스템이 선진화된 대기업들은 오히려 일과 삶의 균형이 제도적으로 정비되어 있다. 더 작은 기업과 작업장까지 이 문화를 확산시키려는 정책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고대권 코스리(한국SR전략연구소) 미래사업본부장 accrea@kos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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