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94. 복녕궁주(福寧宮主)

입력 2017-04-14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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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均分상속’ 활용 자신의 富 직접 관리

복녕궁주(福寧宮主, 1096~1133)는 고려 숙종과 명의왕태후 유씨(明懿王太后 柳氏)의 막내딸이다. 위로 오빠인 예종과 대녕궁주(大寧宮主), 흥수궁주(興壽宮主), 안수궁주(安壽宮主) 세 언니가 있었는데, 늦둥이인지 형제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예종은 1079년생이니 그녀보다 16년 위이고, 첫째와 둘째 언니가 1103년, 셋째 언니가 1105년에 공주 책봉을 받음에 비해 그녀는 1114년에야 공주가 되기 때문이다.

복녕궁주의 묘지명에는 ‘천자(天子)의 따님이여, 보름달 같으셨네’라는 구절이 보인다. 당시는 고려의 전성기로, 고려인 스스로가 고려왕을 ‘천자’라 칭하며, 중국 황제와 동격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또 ‘보름달 같다’는 표현에서 달처럼 환했을 그녀의 외모가 그려진다. ‘고려사 공주전’ 및 그녀의 묘지명에 따르면, 복녕궁주는 성격이 온순하여서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 한다. 또 총명하고 효성스럽고 부지런하며 부처님을 잘 섬겼다고도 한다.

복녕궁주는 종친인 진강백(晋康伯) 왕연(王演)과 혼인하였다. 왕연의 아버지는 문종과 인경현비(仁敬賢妃)의 아들인 진한공(辰韓公) 왕유(王愉)이다. 복녕궁주의 아버지 숙종은 문종과 인예태후(仁睿太后)의 아들이니, 아버지의 배다른 형제의 아들과 사촌 간에 혼인한 셈이다. 이는 고려 왕실의 혼인 관행상 지극히 일반적인 경우이다. 고려시대에 공주들은 모두 왕실 내에서 배우자를 찾았다. 왕족의 범주를 되도록 확대하지 않고, 신성성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혼인한 뒤 그녀는 지어미의 도(道)를 잘 지켜 엄숙하고 온화한 덕을 이루었다. 또 재부(財富)가 많기로 종실에서 으뜸이었으며, 불교를 독실히 믿어 절의 탑과 사당[廟]들을 짓고 그것을 장식하는 일을 매우 열심히 하였다고 한다.

재부가 많다는 것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많다는 의미이다. 고려시대는 자녀균분상속(子女均分相續)이었다. 즉 아들과 딸에게 상속분의 차이를 두지 않았으며, 딸의 혼인 여부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혼인 시 가져간 여성의 재산은 시가의 재산으로 흡수되지 않았으며, 여성 자신에게 관리와 처분권이 있었다. 만일 여성이 죽으면 소생 자녀에게 상속되고, 자녀가 없을 경우에는 친정에 귀속되었다. 철저한 부부별산제(夫婦別産制)로, 만일 남편과 아내가 사찰에 시주를 할 경우 남편과 아내의 재산을 구분하여 기록할 정도였다. 고려시대의 여성들은 자기의 재산으로 영리 활동을 하거나 사찰에 시주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복녕궁주 역시 자신의 재산을 신앙 활동에 아낌없이 썼던 것으로 보인다.

복녕궁주는 1133년에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녀는 없었으며,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남편은 그녀보다 13년 뒤인 1145년에 세상을 떠났다. 복녕궁주는 고려 전성기의 공주로서 왕실의 족내혼(族內婚)과 여성의 재산상속과 처분권, 신앙생활 등 다방면에 대한 지식을 알려준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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