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56. 강빈

입력 2017-02-20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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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에 볼모 잡혔던 소현세자빈, 시아버지 인조가 역모로 몰아

소현세자빈 강씨는 1646년 3월 15일 시아버지 인조로부터 사약을 받았다. 인조는 두 달 전부터 자신의 음식에 독을 넣었다며 강빈을 압박했다. 강빈 쪽 궁녀들은 모진 고문에도 모두 죄를 인정하지 않고 죽었다. 인조는 이것으로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다른 죄목을 더했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에 비밀히 왕후의 자리를 바꿀 것을 도모하여, 붉은 비단으로 왕후의 옷을 미리 만들고 내전이라는 칭호를 버젓이 참람되게 일컬었다. 지난해 가을에는 분하고 노여워하며 내 거처 가까운 곳에 와서 큰 소리로 발악하고 아랫사람으로 문안하는 것까지도 여러 날을 폐했으니, 이 일을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을 차마 못 한단 말인가?”

강빈의 또 다른 죄목은 역모였다. 인조는 독약사건 한 달 후 폐출을 강행했고, 또 그 한 달 후 사약을 내렸다. 이것이 이른바 강빈옥(姜嬪獄)이다.

그런데 사실 이 옥사에는 명확한 근거가 없었다. 독약사건에 자백한 이도 없었고, 심양에서의 참람한 행위라는 것도 증명할 길이 없었다. 당시 강빈을 사사(賜死)하는 데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은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인조는 결국 강빈을 사사했다. 이미 소현세자도 죽고 없는 상황인데 인조는 왜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뒀을까?

먼저 강빈이 총부(冢婦)라는 점이 인조를 긴장하게 했다. 남편이 먼저 죽은 맏며느리를 총부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총부권이 강했다. 총부들이 양자할 때 시동생 아들보다는 10촌 이상의 먼 친족을 택했다는 사실이 총부들의 권력 의지를 보여준다. 강빈은 바로 이런 위치에 있었다. 이미 봉림대군이 왕세자가 되기는 했지만, 강빈은 총부이고 또 원손의 어머니로서 언제든 다시 왕위 계승에 간여할 수 있었다. 이때 신하들 중에는 봉림대군이 아니라 원손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더 많았다.

또 강빈은 경제 능력이 있었다. 심양에 있을 때 청이 마련해준 농장에서 강빈은 탁월한 경영 능력을 발휘했다. 심양에서 돌아오기 전 5000석에 가까운 곡식을 쌓아놓고 있었다고 한다. 또 돌아와 강원도 철원의 한 절에 시주한 돈이 황금 260냥이었다고 한다. 지금 돈으로 몇 십억은 될 듯하다. 이 시줏돈은 강빈이 폐해진 후 강원도 재정의 일부분으로 요긴하게 쓰일 정도였다.

그리고 강빈은 심양에 살면서 청의 선진 문물을 접하고 넓은 세상을 봤다. 조선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이 점이 어쩌면 인조 입장에서는 가장 두려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당시 청은 은근히 왕위 교체의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고 한다. 인조에게 강빈은 정적일 수 있었다.

강빈은 다소곳하기보다는 적극적인 세자빈이었다. 다음 세대의 권력자인 세자와 세자빈은 현 왕에게 가장 중요하면서도 경계의 대상이 된다. 적극적이고 능력 있는 강빈은 시아버지 인조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강빈은 숙종 때에 복위되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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