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①삼모부인

입력 2016-12-01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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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불행을 넘어 문화사적 업적을 남기다

신라 최고의 귀족 가문

삼모부인(三毛夫人)은 신라 제 35대 경덕왕의 첫 왕비였다. 삼모부인이 왕비가 되었던 것은 집안의 배경이 남달랐던 덕분이다. 아버지는 김순정(金順貞)으로, 신라 제2관등인 이찬(伊飡)이었다. 김순정은 일본에까지 알려진 인물이었는데, 성덕왕 25년(726년)에 사망하자 일본에서 애도하는 글과 직물을 부의로 보낼 정도였다. 삼모부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된 것은 없다. 그런데 길을 가던 노인이 꽃을 꺾어 바칠 정도로 미모가 출중했다는 ‘헌화가’의 주인공 수로부인이 김순정의 부인으로 설명되고 있어 흥미롭다.

출궁당한 왕비

삼모부인이 경덕왕과 언제 혼인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왕비로서의 삶은 길지 않았다. 경덕왕 2년에 김의충의 딸 만월부인이 후비로 입궁하였는데, 그 전에 출궁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출궁의 이유는 아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삼국유사’에는 경덕왕이 아들을 얻기 위해 고심하는 내용의 설화가 실려 있다. 경덕왕에게 후사 문제가 그만큼 절박했음을 알 수 있다. 삼모부인의 출궁을 정치적 갈등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들이 없다는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나 신라의 출궁은 왕비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뿐, 사회적 지위를 박탈하거나 활동에 제약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삼모부인은 출궁 후, 사량부인(沙梁夫人)에 책봉되었다. 부인이라는 칭호는 귀족 부인들에게서 나타난다. 왕비는 아니지만 제한된 여성들에게만 주어지는 ‘부인’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는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황룡사종의 시주자

삼모부인은 출궁 후 10여 년이 넘은 시점에 다시 역사 무대에 등장하였다. 754년(경덕왕 13년)에 황룡사(皇龍寺) 종을 만들었는데 삼모부인이 이찬 효정(孝貞)과 함께 시주자로 참여한 것이다. 황룡사종은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현재 남아 있는 신라시대 종 가운데 가장 큰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봉덕사종의 4배 정도의 크기였다고 한다. 동종을 주조하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삼모부인이 상당한 경제적인 기반을 가진 재력가임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황룡사는 신라의 국가적 대사찰이다. 그렇다면 황룡사종의 주조는 경덕왕이 주도한 국가적인 사업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삼모부인은 경덕왕이 주도하는 국가적 사업에 시주자로 동참한 것이다. 이는 출궁 후에도 경덕왕과 완전히 절연한 채 쓸쓸하게 지냈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삼모부인은 아들이 없어 출궁을 당해야 했던 개인적인 슬픔을, 국가적 사업의 시주자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삼모부인의 모습에서 개인적 운명에 안주하지 않고 사회적인 활동으로 승화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김선주/ 저서 ‘우리 여성의 역사(공저)’ ‘한국 여성사 깊이 읽기(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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