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리포트] “억울해서 못 살겠다”…진실 규명 과정 vs 마구잡이 소송

입력 2021-04-26 05:00수정 2021-04-26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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贊 단순 소권남용 땐 재판부가 각하…공익목적 있다면 소송 문제 없어
反 개인적 감정 싸움에 '법정 공방'…법원 행정력 낭비 불보 듯 뻔해

용산참사를 모티브로 한 영화 소수의견이 2015년 개봉하면서 ‘100원 소송’은 낯설지 않은 단어가 됐다. 강제철거 현장에서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국가를 상대로 소송가액 100원의 손해배상소송을 낸 것은 허구였지만, 시나리오 작가에게 영감을 준 것은 실제 사건은 지율스님의 ‘1원 소송’이었다.

지율스님은 2003년 경부고속철도 건설을 위한 대구 천성산 터널 공사에 반대하며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조선일보는 천성산 공사가 지연되면서 수 조 원이 넘는 사회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다고 보도했고, 지율스님은 허위보도로 정신적 손해를 입었다며 조선일보를 상대로 1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최근에는 프로듀스101 투표 조작 사건으로 ‘100원 소송’이 더 알려졌다. 엠넷(M.net)의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내 순위 조작 사실이 드러나자 생방송 문자투표에 참여했던 시청자 박모 씨는 프로그램 제작진을 상대로 투표 참가비용이었던 100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최근 늘어나는 ‘동전 소송’에 대해 법조계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찬성하는 쪽에서는 동전 소송이 금전적 배상이 아닌 진실 규명을 목적으로 하는 가치 있는 소송이며, 법치주의 사회에서 억울함을 해소할 수 있는 합법적 수단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반면 묻지마 소송이나 마구잡이식 소송으로 변질될 수 있고 언론플레이로 관심만 끌고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있다.

일상에 스며든 ‘100원 소송’…“권리의식의 확대”

얼마 전까지 ‘100원 소송’은 우리 사회가 공익이라고 지칭할만한 사건에 상징처럼 따라붙는 이름표였다. 대부분의 ‘동전 소송’은 과거 공권력에 의해 신체적·정신적 폭행을 당했던 피해자들이 제기하는 사건들이었다. 이들에게 ‘동전 소송’은 국가의 위법 행위를 확인받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이자 사회적 관심을 유발해 진실을 인정받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명예를 회복하고 자신의 과거에 당당해지고자 하는 목적이 컸다.

유신헌법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여성운동가 고은광순 씨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1원 손해배상 소송, 정부가 허위 기술검증 결과를 가지고 제주해군기지 공사를 강행했다며 강동균 전 강정마을 회장이 김황식 전 국무총리를 상대로 제기한 1원 손해배상 소송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동전 소송’의 범위가 훨씬 넓어졌다. 프로듀스101 사건을 비롯해 한 소설가가 영화 ‘연평해전’이 자신의 작품을 표절했다며 영화감독을 상대로 100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사례 등 일상에서 느끼는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한 소송이 속속 등장했다.

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시민들의 권리의식이 높아진 것이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이어 “인터넷을 이용해 좀 더 쉽고 다양하게 법률적 지식을 접하다보니 법원이라는 곳에 대한 벽이 낮아졌다고 볼 수 있다”면서 “최근에는 로스쿨이 생기고 변호사가 많아져 시민들이 법과 관련된 조언을 구할 수 있는 기회도 계속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진실 규명’과 ‘생떼 쓰기’의 양면성

법조계 내에서는 동전 소송을 바라보는 시각이 극명하게 갈린다. 한쪽에선 묻지마 소송이나 마구잡이식 소송으로 변질돼 법원의 행정력만 낭비하게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언론플레이로 관심만 끌 뿐 실제로 소송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는 사람들도 다수란 의견이 있다.

서울의 한 변호사는 “소송을 남발하는 ‘남소’가 가장 우려되는 점인데 일반적으로 상대방을 번거롭게 하기 위한 소송이나 개인적 감정싸움을 위한 소송들이 여기에 해당한다”며 “소송의 목적 자체가 정당한 판단을 구하는 수단이 아니라 분풀이를 위한 ‘생떼 쓰기’ 수단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다른 쪽에선 판사가 소권남용 각하 판결로 남소를 충분히 방지할 수 있는 만큼 진실 규명을 위한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

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재판부가 소송의 목적과 취지를 보고 단순히 상대방을 괴롭히기 위한 소송은 소권남용이라고 판단해 각하 판결을 내린다”면서 “이런 소송이 많아진다고 문제가 생기거나 사회적 비용이 크게 증가한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실질적으로 공익적 목적이 있고 의미 있는 무엇인가를 추구하려는 소송이라면 (동전 소송이라도) 진행하는 것이 맞다”면서 “지금까지는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이 많았는데 이런 것들이 판결문으로 기록되면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선례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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