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형의 오토 인사이드] ‘액티브 시니어’를 위한 고성능 아이콘, GT(Grand Tourer)

입력 2019-10-2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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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 21세기 4인승 GT 개념 정립…가장 GT 다운 국산차는 기아차 스팅어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자동차는 대량생산 체제에 접어들었다.

전장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뽑아내기 위해 자동차 공장도 쉼 없이 돌아갔다.

결국 전쟁이 끝나고 자동차 대중화 시대가 접어들 때에도 차는 다양화보다 획일화에 멈춰 있었다. 다양한 모델을 찍어내기보다, 하나의 모양을 여러 개 찍어내는 게 자동차 회사에도 이익이었다.

우리나라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모터리제이션(자동차 혁명)이 일어난 1980년대에는 앞집 차가 우리 차와 같았고, 뒷집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고를 수 있는 차종이 손가락에 꼽는 수준이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온 나라가 3박스 타입의 평범한 세단 천지였다.

시간이 지나고 자동차 산업은 경쟁구도를 확대했다. 주요 완성차 메이커는 차별화를 위해 고성능 모델을 앞다퉈 내놓기도 했다.

이들 고성능차는 불티나게 팔리면서 자동차 회사의 배를 불려줄 모델이 아니다. “우리도 이런 차를 만들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담아 자동차 회사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이른바 ‘이미지 리더’의 성격이 강했다.

▲GT는 장거리 투어러를 의미한다. 둘 또는 넷이 장거리를 달리기에 모자람이 없어야 한다. 그에 걸맞는 엔진 성능과 공간, 편의장비는 필수다. 사진은 BMW 3시리즈 GT. (출처=BMW글로벌미디어)

◇브랜드 이미지 리더로 떠오른 고성능=독일 3대 프리미엄 브랜드 역시 값비싼 고급차를 넘어 고성능 서브 브랜드를 속속 내세웠다.

메르세데스-벤츠가 고성능 AMG로 차별화에 나선 것과 마찬가지로 BMW는 고성능 M버전을, 아우디는 S와 RS버전을 앞세운다. 고성능을 향한 이런 집념은 고성능 스포츠카의 발전을 부추기기도 했다.

이런 고성능 차는 대륙별로 그 성향도 다르다.

유럽에서는 페라리와 람보르기니로 점철되는 이른바 엔진이 가운데 달린 미드십 슈퍼카를 정점으로 여겼다.

반대로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평원이 이어진 미국에선 미드십 슈퍼카보다 5000~6000cc를 넘나드는 대배기량 고성능 쿠페가 인기였다.

쉐보레 카마로와 포드 머스탱 등이 장악한 이른바 ‘머슬카’ 영역이다. 이들은 2명이 타는 쿠페 형태지만 디자인은 울퉁불퉁 근육질 보디를 자랑한다.

▲BMW GT의 등장에 화들짝 놀란 아우디 역시 발빠르게 A7을 선보였다. 고급차 영역에 머물고 있으나 기본 콘셉트는 다분히 GT다. (출처=아우디프레스)

◇고성능과 고급차가 조화를 이룬 GT의 등장=이렇게 일반 양산차와 소량생산 고성능차의 날카로운 경계선이 희미해지면서 고성능차는 더욱 다양해졌다.

이렇게 글로벌 전역에서 새로운 영역을 앞세워 등장한 모델이 이른바 GT(Grand Tourer)다.

이탈리아어 그란 투리스모(Gran Turismo)에서 파생된 말인데, 사전적 의미만 따져보면 장거리를 달리기 위한 고성능차를 뜻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최고출력으로 GT를 구분하지 않는다.

혼자 아니면 둘이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콘셉트에 따라 초창기 GT의 대부분이 2인승 쿠페였다.

이후 GT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2000년대 이후 4도어 세단에 고성능 엔진을 얹은 4도어 GT도 등장했다.

GT는 단순히 고성능을 지향한 스포츠카와 다르다.

스포츠카가 작고 가벼우며 날렵한 디자인을 갖췄다면, GT는 일반 양산차와 다를 바 없는 차 크기를 바탕으로 먼 거리를 달리기에 불편함이 없는 성능을 지닌 차다.

여기에 여행에 필요한 넉넉한 짐 공간을 갖췄고, 스포츠카 못지않은 날렵한 디자인도 지녀야 했다. 매일 타도 부담이 없는 고성능차가 GT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이처럼 일반 대중 모델과 스포츠카 사이의 경계선에 머물러 있는 GT는 가격이 만만치 않다.

스포츠카 못지않은 고성능 엔진을 얹은 것은 물론, 일반 생활에도 불편함 없는 편의 장비를 가득 담다 보니 가격은 고급차 수준이다.

결국 젊은 시절 스포츠카를 갈망했으나 이제는 흰머리가 가득해진 이른바 ‘액티브 시니어’들이 GT의 주요 고객이 되기도 한다.

▲전기차 시대에도 GT는 여전히 당위성을 지닐 것으로 전망된다. 사진은 아우디 전기차 e-트론 GT의 모습. (출처=아우디프레스)

◇BMW가 제시한 4도어 GT의 세계=2000년대 들어 대놓고 차 이름을 GT로 앞세운 브랜드가 독일 BMW다.

3, 5, 7시리즈로 나뉘었던 등급과 별개로 오로지 GT를 내세웠다. 밑그림은 5시리즈였으나 차 특성과 성능은 어느 등급에도 속하지 않았다.

BMW 세단과 SUV의 장점을 교묘하게 조합해 새로운 영역을 파고든 점도 눈길을 끌었다.

BMW GT는 이름처럼 장거리 투어링에 모자람이 없는 고성능과 편의 장비를 갖추고 있다.

초기에 선보였던, 2+2구성의 4인승 모델은 특히 뒷자리가 일품이었다. 최고급 모델이었던 7시리즈에 견줘도 부족함이 없는 뒷자리 공간과 편의장비가 매력이었다. “진정한 GT는 이래야 해”라는 새로운 개념도 정립했다.

국내에서는 기아차 스팅어가 진정한 의미의 GT로 여겨진다.

이 차보다 성능이 앞서고 공간이 더 넉넉한 모델이 여럿이지만 GT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린 모델은 스팅어라는 데 이견이 없다.

▲국산차 가운데 GT의 개념에 가장 근접한 모델은 기아차 스팅어다. 성능과 공간, 편의성에서 장거리 투어러로 손색이 없다. (출처=기아글로벌미디어)

◇국산 GT의 대표모델 기아차 스팅어=특히 꼭짓점에 자리한 V6 3.3 터보는 여러 조건이 GT에 부합한다.

현대기아차의 뒷바퀴굴림 플랫폼을 바탕으로 네바퀴굴림 AWD를 갖췄다. 앞뒤 무게 배분이 50대 50에 가까운 덕에 노면 굴곡에 따라 뒷좌석이 출렁거릴 일이 적다.

가격과 배기량은 준대형차 K7과 고급 대형차 K9 사이에 자리 잡았으나 애초 개발 콘셉트대로 K시리즈와 별개의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이름도 K시리즈의 굴레를 벗어난 스팅어다.

나아가 웬만한 스포츠카를 가볍게 무시해 버릴 수 있는 날렵한 디자인도 GT로서의 당위성을 확대한다.

제네시스가 뚜렷하게 고급차를 지향점으로 내세웠다면, 스팅어는 고급차+고성능차라는 콘셉트를 지닌 셈이다.

최근 외신으로부터 “스팅어 단종”이 보도되기도 했다. 이유는 부진한 판매 탓이다.

고성능은 기본이되 고급장비까지 포함한 GT의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싸다. 그만큼 구매력을 지닌 특정 계층을 겨냥하고 있다. 당연히 잘 팔리는 일반 모델과 비교할 수 없다.

나아가 스팅어는 이미지 리더의 역할이 뚜렷하다. 변변찮은 스포츠카 없이 ‘스포티 브랜드’를 추구하는 기아차에 반드시 필요한 차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 스팅어 단종 가능성이 나오자 일각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시니어 럭셔리를 추구하는 현대차가 제네시스를 출범한 것처럼, 스포티를 지향점으로 삼아온 기아차가 새로운 고성능 브랜드를 출범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주장이다. 제네시스가 그랬던 것처럼, 새 브랜드의 이름이 ‘스팅어’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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