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소주병과 연예인…사회적비용 지불은 누가

입력 2019-11-0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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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김태희·성유리·하지원·이민정·아이유·아이린·이효리·유이·신민아·수지.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인기 여성 연예인, 그리고 소주 광고 모델이라는 점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마치 당연한 것처럼 소주병에 붙어 있던 이들의 얼굴을 앞으로는 보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보건복지부가 음주가 미화되지 않도록 술병 등 주류 용기에 연예인 사진을 부착하지 못하도록 관련 규정을 개선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뉴스 댓글을 보면 의견이 팽팽하게 나뉜다. 담배에는 보기에도 끔찍한 경고 사진이 붙어 있는데, 담배와 마찬가지로 폐해가 심각한 술은 마치 음료처럼 방치되고 있다는 의견이 많다. 반면, 값싸고 친숙한 서민의 술인데 이마저도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냐며 불만을 토로하는 댓글도 상당수다. 이들은 담배 가격 인상에 경고 사진을 붙여 흡연을 어렵게 한 데 이어, 이제 소주까지 제재의 칼날을 들이댄다면 서민들은 무엇에 위로를 받느냐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어땠을까.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것으로 알려진 담배는 상륙 당시 만병통치약처럼 모든 질환에 효능이 있는 약초로 여겨졌다. 구충(驅蟲)을 목적으로 어린아이들까지 흡연을 시키는 일도 다반사였다. 훈장과 학도가,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피울 정도로 별다른 금기가 없다 보니 흡연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빠르게 퍼졌다. 그 폐해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다.

술 역시 우리 조상들은 호방하게 마셨다. 요샛말로 ‘원샷’은 기본이었고, ‘과음’은 필수였다. 양반들이 따랐던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보면, 윗사람의 술을 받은 아랫사람은 ‘졸치(卒觶)’하는 것이 법도였다. ‘졸치’는 단숨에 잔을 비우는 것을 뜻한다.

영조가 연회에 사용한 ‘치(觶)’라고 불렀던 술잔의 양은 여섯 홉에 달했다고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한 홉이 180㎖에 해당하니, ‘치’에 술을 가득 담으면 1ℓ가 넘는 양이다. 그런데 ‘치’는 아래가 동물의 뿔 끝처럼 뾰족한 모양이어서 술을 따르면 다 마실 때까지 내려놓지 못하고 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과음을 위한 최적의 술잔인 셈이다.

이것뿐이랴. 폭탄주의 조상이 조선 중기에 등장하기도 했다. 연산군4년, 관직에서 쫓겨나 의주에서 귀양살이하던 정희량은 막걸리에 독한 증류식 소주를 섞고 ‘혼돈주(混沌酒)’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는 ‘혼돈주가(混沌酒歌)’라는 한시를 쓰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술, 담배에 관대한 사회였다. 요사이 담배는 만악(萬惡)의 근원으로 여겨질 정도로 부정적인 이미지로 바뀌었지만, 술에 대한 태도는 여전히 너그럽다. 담배나 술이나 모두 1급 발암물질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도 술은 친목을 위해, 사회생활을 위해, 그리고 즐거움을 위해서 어느 정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정서가 일반적이다.

건강보험정책연구원이 2013년 추산한 음주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은 흡연으로 인한 비용(7조1258억 원)보다 25%가량 더 많은 9조4524억 원에 달한다. 하지만 국가금연사업이 1388억 원의 예산을 집행하는 것과 달리, 음주 폐해 예방관리사업 예산은 13억 원에 불과하다. 음주에 대한 관대한 시각이 정책까지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홍보(PR)의 정립자’로 불리는 에드워드 버네이스(1891~1995) 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한 마케팅은 ‘자유의 횃불(torches of freedom)’ 캠페인이다. 버네이스는 1929년 부활절에 여성 30명을 고용해 담배를 피우면서 행진하게 했고, 이들은 “여성도 남성처럼 길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도록 자유의 횃불을 들자”라고 외쳤다. 이 광경을 본 당시 여성들은 담배가 자유의 상징이자 여권 신장이라고 믿었다.

조작된 이미지는 여성의 흡연율을 크게 높였고, 버네이즈에게 마케팅을 맡긴 담배업체 아메리칸토바코는 폭발적인 매출 성장에 쾌재를 불렀다.

인기 연예인의 얼굴을 소주병에 붙이는 마케팅은 음주를 친숙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갓 성인이 된 어린 광고 모델을 기용해 음주 연령층을 낮추려는 의도도 숨기지 않았다. 주류업체의 매출이 오르는 만큼, 사회가 지불해야 할 비용은 늘어난다. 그리고 그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돌아온다.

우리나라 소주병에 그려진 광고 모델을 보고 의아해하던 외국인이 ‘실종 아동 사진이냐’라고 물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소주병에 연예인 사진이 사라지게 되면, 이런 오해도 자연스레 풀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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