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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락 칼럼]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 다시 보는 북핵문제 연원
입력 2019-02-22 05:00
서울대 정치학과 객원교수

2차 북미 정상회담이 며칠 후로 다가왔다. 회담 결과에 대한 추측이 무성하다.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과거 북한이 핵 개발의 길로 들어서던 때의 일을 돌이켜 보고 싶다. 그때에도 기회는 있었다. 놓쳤을 뿐이다. 당시 경과를 살펴보면 각방(各邦)의 판단착오가 드러난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문제를 더 꼬이게 하지 않고 풀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교훈도 얻을 수 있다.

북한이 핵 카드를 만지작거린 때는 냉전 종식 시기였다. 1980년대 말 소련에서 시작된 페레스트로이카와 이어진 정치·경제·사회적 격변과 소련의 붕괴, 중국의 개혁·개방 노선으로의 전환은 교조적인 공산주의의 틀 속에 있던 북한에 충격이었다. 소련과 중국이라는 사회주의 후견국이 변질되었다는 사실은 북한에 정치·안보·경제적 보호 장치가 결정적으로 약화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컨대 북한은 냉전 시기에 소련으로부터 원유 등 에너지를 사회주의 우호가격이라는 이름으로 저렴하게 도입해 왔는데, 소련의 변화에 따라 이러한 지원이 없어졌다. 북한 경제난의 일차적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이 시기에 한국의 노태우 정부는 소련과 중국에서의 변화를 감지하고 이들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는 북방 외교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 정책은 냉전 종식 분위기와 맞물려 성과를 내었다. 한국은 1990년대 초에 소련·중국과 수교하였다.

북한은 자신의 후견세력이 변질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과 수교하기에 이르자, 패배감 상실감 고립감 그리고 배신감 속에서 안보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변화한 소련과 중국은 더 이상 북한의 안보동맹으로 기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기의식하에서 생존을 고심하던 북한은 핵 무장 쪽으로 선회하게 된다. 1990년 한소 수교 조금 전, 당시 소련 외상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가 한국과의 수교 불가피성을 설명하러 방북하였을 때, 북한의 김영남은 설명을 경청한 뒤 반론을 하지 않으면서, 비장한 어조로 핵 무장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북한이 생존 수단으로 핵 옵션을 고려하고 있음을 밝힌 첫 사례였다.

만일 당시 북방외교에 주력하고 있던 한국이 소련·중국과 수교를 추진하면서, 동시에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일본과 관계를 개선하고 개방으로 나오도록 유도하는 여유와 통찰력을 가졌다면 그 후 상황 전개가 달랐을지 모른다.

노태우 정부는 북한의 후견국이었던 소련과 중국을 우리 편으로 견인해 낸 데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고, 미소 냉전에서 미국이 이긴 것처럼 남북 경쟁에서 우리가 이기고 있다는 승리주의 인식을 갖고 있었다. 탈냉전 상황을 활용하여 외교적 성과를 거두고 있었지만, 북한에 대해 냉전적 사고를 적용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당시 미국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당시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미국 내 외교안보 진용 일각은 탈냉전 기류가 생겨나고 있던 1980년대 말부터 북한과의 대화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레이건 행정부와 뒤이은 부시 행정부가 ‘Modest Initiative’라 불리는 대북 접촉을 시작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접촉은 베이징의 북미 대사관 간 실무급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시종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1990년 한소 수교, 1991년 한중 수교와 남북기본합의서 체결로 한국의 대공산권 관계와 남북 관계가 개선되자 미국 내 대화파는 북한과의 접촉에 좀 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1992년도 팀스피릿 훈련 중지 구상이 제기되었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도널드 그레그가 이를 주장하였는데, 그는 워싱턴의 호응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훈련은 중단되었다.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6일 앞둔 21일 오전(현지시각) 베트남 하노이 JW메리어트 호텔 앞 음식점에 인공기와 성조기, 금성홍기가 내걸려 있다. 이 호텔은 북미회담 일정 동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용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하노이/뉴시스

북미 관계 여건이 호전되자, 급기야 고위급 접촉이 추진되었다. 1992년 1월 김용순 노동당 비서와 아놀드 캔터 미국 국무차관이 뉴욕에서 회동하였다. 정전협정 이래 최초의 접촉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이 접촉에 반대하다가 여의치 않자, 회동이 1회에 한할 것을 강력히 주문하였다. 한소, 한중 수교가 이루어진 상황에서도 한국은 북미 대화에 반대한 것이다.

그런데 북미 대화에 대한 미국 내 관심은 주로 외교안보 부서 일각에서 나왔을 뿐, 미국 정부와 의회 내에 큰 지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 내에서도 주된 분위기는 냉전 승리였고 쇠락하는 작은 공산국가와의 대화는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게다가 김용순-캔터 협의는 별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김용순은 종전의 교조적 주장을 반복하였다. 회담 성과가 신통치 않은 데다가, 한국 정부도 반대하고 미국 내 정치적 지지도 미진하자, 미국 내 대화파도 북미 고위급 대화를 계속 밀고 가기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반면 북한은 북미 대화를 지속하는 데 큰 관심을 보였다. 회담에서 별 성과가 없었음에도 결과 발표문을 내자고 하였고, 후속협의 일정도 합의하자고 하였다. 미국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한국의 주문대로 회동은 1회로 끝났다. 당시 미국 내에 이러한 대응이 초래할 후과에 대한 통찰은 없었다. 중요한 협상 기회가 이렇게 일실되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인 1992년 초부터 북한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이에는 핵 사찰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IAEA는 북한이 안전조치 협정을 어기고 플루토늄을 추출하였다고 보고, 특별사찰을 요구하였다. 북한은 이를 거부하였다. 논란은 이해 내내 이어졌다. 북한에 대한 불신은 높아갔다. 이러한 분위기가 영향을 미쳐 그해 말 한국과 미국은 다음 해 팀스피릿 훈련 재개를 결정하였다.

북한은 기대했던 김용순-캔터 협의가 중단되고 팀스피릿 훈련도 재개되자 강수를 고려하게 된다. 그러다가 1993년 초 IAEA 이사회가 북한에 대한 특별사찰을 결의하였다. 북한은 핵 비확산조약(NPT) 탈퇴라는 폭탄선언으로 대응하였다. 1차 북핵 위기는 이렇게 발생한다.

종합해 보면, 북한은 탈냉전 시기에 자신의 후견국이 변질되고 한국과 수교까지 하는 상황을 맞자, 생존 수단으로 핵무장을 검토하였고, 비밀리에 플루토늄을 추출하다가 IAEA의 감시에 걸린 것이다. 그런데 모처럼 열린 미국과의 대화와 팀스피릿 훈련 중단에 걸었던 기대가 무산되고 국제사회의 특별사찰 요구가 당도하자, 북한은 NPT 탈퇴를 결행하며 핵 무장 옵션을 집어 들었다. 북한으로서는 충격요법을 통해 미국을 고강도 협상으로 견인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행동 경로는 그 후 30년 가까운 북핵 협상 과정에서 북한이 반복적으로 보여준 패턴이 되었다.

탈냉전 시기에 소련의 보호망이 사라지는 상황을 겪은 나라가 북한만은 아니었다. 동구권과 중앙아시아의 공산국가들도 유사한 상황에 처했었다. 그렇지만 그들 대부분은 개혁 개방하고 시장경제화함으로써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특이하게도 핵 무장을 통한 생존이라는 길을 추구한 것이다.

북한이 그 길을 택하기까지 한국, 미국, 북한이 취한 대응을 돌이켜 보면 몇 가지 교훈이 떠오른다. 우선은 중요한 협상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위기가 온다는 것이다. 또 그러한 기회를 살리려면 각방이 교조적인 생각에 집착하지 않고 유연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승리주의를 내세우면 진정한 협상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1차 북핵 위기 전에는 한미의 승리주의가 있었다. 지금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래 북한의 승리주의가 우려된다.

이제 우리는 다시 역사적인 협상 기회를 앞두고 있다. 걸맞은 큰 성과를 기대한다. 과거를 교훈삼아 이 기회를 살리기 바란다. 기회를 잃으면 위기가 온다.

주러시아 대사, 외교통상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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