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이코노미] 영화 '버닝' 속 부의 대물림…"직업이요? 그냥 노는 거에요"

입력 2019-02-18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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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수(유아인 분)는 택배 알바를 하면서 작가에 대한 꿈을 놓지 않는 평범한 청년이다. 어느 날 해미(전종서 분)가 소개시켜준 돈 많은 벤(스티븐 연 분)을 만나면서, 그를 계속 의심하기 시작한다. (사진제공=CGV아트하우스)

“혹시 무슨 일 하시는지 물어봐도 돼요?”

“간단히 말하면 그냥 노는 거에요.”

간단히 말하면 노는 것이 직업인 벤(스티븐 연 분). 그는 금수저다. 특별한 직업이 없다. 하지만 그의 차는 포르쉐고, 혼자 사는 집은 드레스룸과 서재가 갖춰진 펜트하우스다. 벤과 그의 가족들은 대리석 바닥의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식사한다. 벽에는 고가의 예술작품이 일렬로 전시돼 있고, 스테이크에는 간단한 레드 와인을 곁들인다.

종수(유아인 분)와 해미(전종서 분)는 흙수저다. 종수는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비를 마련한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작가를 꿈꾸지만, 아르바이트가 끝난 뒤에는 펜 한 번 잡아볼 시간이 없다. 부모님은 어릴 때 이혼했고, 아버지는 시골에서 소를 키운다. 해미는 나레이터 모델을 하며, 침대 하나 겨우 들어가는 곰팡이 핀 원룸에서 산다. 해미네 가족은 테이블 3개가 있는 코딱지만 한 국밥집을 운영한다.

아등바등 살지만 계속 제자리걸음인 종수와 해미. 그냥 놀지만,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누리는 벤. 영화는 세 주인공의 부모님을 모두 출연시킨다. 더 나아가 부모의 이혼 사유, 그들의 직업과 처지를 자세히 묘사한다. 영화는 이 묘사를 통해 부모의 부가 자식의 부로 전이되는 고질적인 한국 사회의 문제를 은근하게 드러낸다.

▲벤은 같은 부류의 친구들 모임에 해미를 초대한다. ‘금수저’ 친구들은 해미가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안주거리로 삼는다. (사진제공=CGV아트하우스)

대한민국에서 금수저와 흙수저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은 ‘부의 대물림’이다. 대표적인 것이 부동산 증여다. 지난해 우리나라는 부동산 증여 건수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한국감정원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11월까지 전국 주택 증여 건수는 10만1746건으로, 2017년 대비 14% 증가했다. 같은 기간 내 서울 증여 거래는 전년 대비 521% 증가한 2만2587건이었다. 이 또한 사상 최고치다.

증여는 성년과 미성년을 가리지 않는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미성년자에 대한 증여액은 2015년 5545억 원에서 2017년 1조270억 원까지 상승했다. 같은 기간 증여 건수는 5274건에서 7861건으로 증가했다. 미성년자 증여가 늘면서 지난해에는 만 4세 유치원생이 국세청 세무조사 대상에 오르기도 했다. 유치원생이 아파트 2채를 4억 원에 사들였는데, 증여세 신고 내역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만 12세 초등학생도 아파트 2채를 11억 원에 샀지만, 증여 신고 내역이 없어 조사를 받았다.

미성년 증여가 늘어나는 이유는 증여세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다.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 가격이 계속 오를 것으로 생각해, 미리 건물 일부나 전부를 증여하는 것이다. 증여가 많을수록 불법과 편법 증여, 부동산세 탈루도 증가하고 있다. 국세청은 2017년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 1584명으로부터 탈루세금 2550억 원을 추징했다. 지난해 8월에는 부동산자금 편법증여 혐의자 360명에 대한 세무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벤은 항상 미소 지으며 매너를 지킨다. 하지만 그가 웃음 뒤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사진제공=CGV아트하우스)

부의 대물림으로 인한 불평등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21세기 자본론’ 저자 토마스 피케티는 세계 많은 나라 부자들이 부동산을 부의 대물림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자본주의가 태생적이며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만드는 이유로 ‘부의 세습’을 꼽았다. 역사적으로 자본이 돈을 버는 속도가 노동으로 돈을 버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는 것이다.

현재의 자본주의는 자본과 함께 불평등도 자연스럽게 세습되는 구조다. 개인의 능력을 우선시하던 경쟁자본주의가 사라지고, 돈이 권력이 되는 금권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 때문에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다양한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부유세다.

부유세는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가장 뜨거운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 내에서 부유세 논쟁 불씨를 당긴 인물은 오카시오 코르테즈 의원이다. 그는 올해 초 한 인터뷰를 통해 연 소득 1000만 달러 이상 고소득자 최고한계세율을 70%로 인상하자고 주장했다. 초고소득자에 대한 과세를 늘리자는 것이다. 현재 미국 내 여론조사에 따르면 부유세 도입에 찬성한다는 응답자가 60%를 넘고 있다.

▲종수는 실종된 해미를 찾아 벤을 찾아가지만, 해미의 집은 누가 이사라도 간 것처럼 깨끗하게 비워진 상태였다. 겨우 만나게 된 벤은 새로운 여자친구와 함께였고, 해미 소식을 들었냐는 질문에는 모른다는 대답만 반복한다. (사진제공=CGV아트하우스)

영화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헛간을 태우다’가 원작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몇 달에 한 번씩 쓸모없는 헛간을 태우는 것을 취미로 삼는다. 영화 속 벤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으로 본인의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영화와 소설 모두 주인공들의 발화 행위를 살인으로 연상하게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발화의 결과다.

발화자들은 발화 행위에 대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도 모르는, 어디에도 쓸모없는, 누구도 관심 없는 대상만을 골라 발화한다. 그럼에도 금수저들이 누리는 권력에는 어떠한 제재도 가해지지 않는다. 무력한 발화 대상에게 관심을 두기에는 사회가 너무 바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부의 대물림, 이를 끊기 위한 부유세 논쟁. 이제는 사회가 해미와 종수를 살리기 위해 시선을 돌리고 있다. 부유세 논쟁을 시작으로 기본소득에 이르기까지, 부의 순환을 통해 부의 대물림이 아닌 공정의 대물림이 다음 세대에게 전달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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