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의 손편지] 사라져가는 벽걸이 달력

입력 2019-02-0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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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새해가 시작된 지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시간은 나이와 같은 속도로 흘러간다는 말이 실감나는 요즈음이다. 스물, 스물 하나, 스물 둘의 기억은 선명한데 서른 지나면 서른 다섯, 마흔, 그 후엔 쉰, 예순, 일흔이라지 않던가. 1월 달력을 찬찬히 뜯어내고 2월 달력을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새삼 달력도 세월 따라 이런저런 변화를 겪고 있구나 싶다.

우리 외할머니는 “은행 달력을 집에 걸어 두면 재복(財福)이 들어온다”는 속설을 굳게 믿으셨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동네 은행에 들르셔서 새해 달력을 얻어 오시곤 했으니 말이다.

반면 외할아버지는 수영복 차림의 여자 연예인들이 화사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담긴 달력을 훨씬 좋아하셨다. ‘수영복 달력’을 구하지 못하면 한복 차림의 연예인 달력을 걸어두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셨다고 한다. 당시 달력에 등장했던 연예인 모델들은 무명의 탤런트가 아니라 1세대 트로이카라 불리던 윤정희, 문희, 남정임처럼 대세(?) 배우들이었던 기억도 난다. 언제부터 톱 배우를 모델로 세웠던 벽걸이 달력이 사라지게 되었을까, 문득 궁금증이 고개를 든다.

그러고 보니 하루 한 장씩 넘기는 일력(日曆)도 종종 눈에 띄었었다. 동네 구멍가게나 음식점에 들르면 계산대 뒤쪽이나 어딘가 눈에 잘 띄는 곳에 일력이 걸려 있어,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특별히 얇고 부드러운 종이를 활용했던 일력은, 휴지가 몹시 귀했던 시절 화장실 휴지 대용으로 인기를 끌었던 기억도 새롭다.

10여 년 전인가 보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관광할 기회가 있었는데, 관광객 뒤를 따라다니며 손을 벌리던 녀석들 중 하나가 주위 숲 속으로 헐레벌떡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조금 후 녀석은 일을 본 끝이었던지 나뭇잎으로 뒤를 닦으며 나오는 것이 아닌가. 동행했던 어르신 한 분이 “나도 어린 시절엔 나뭇잎으로 밑을 닦았었는데, 그 옛날의 우리 자신을 보는 것 같구먼” 하시며 혀를 끌끌 차셨다.

지금 기억을 떠올려보면 일력엔 보통 태극무늬가 정가운데 그려져 있었고, 음력 날짜와 더불어 각종 절기 등이 적혀 있었으며, 손 없는 날(이사하기 좋은 날) 등의 유용한 생활정보가 꼼꼼히 표시되어 있었던 것 같다.

한데 요즘은 벽걸이 달력의 인기(?)가 눈에 띄게 시들어 감을 실감한다. 은행에 달력을 얻으러 간 길에 이젠 탁상형이 벽걸이형보다 압도적으로 수요가 많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예전 한옥식 단독 주택에는 안방이나 마루에 산수화 달력 하나쯤 걸려 있으면 제법 운치가 있었던 것 같다. 달력의 격조가 집 주인의 품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으니까. 대신 요즘의 신식 아파트엔 달력 걸어둘 곳이 마땅치가 않다. 그림을 걸려 해도 전통 산수화나 옛날 풍경화는 아파트 분위기와 어우러지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달력 앞에 서서 숫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면 한 달이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느껴지곤 했었는데… 한 달 동안 일어날 일을 순서대로 상상해보는 재미 또한 남다른 데가 있었는데… 달력에다 식구들 생일이나 특별한 기념일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해두는 재미도 물론 쏠쏠했었는데…. 벽걸이 달력이 사라지게 되면 그런 소소한 재미도 함께 시들해질 것 같다.

난 지금도 스마트폰 플래너를 터치하는 순간 화면에 뜨는 달력을 보노라면, 시간이 흘러간다는 느낌을 받기보다 왠지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휴대폰에 일정을 메모하고 관리하는 데 익숙지 않은 나는, 가끔씩 휴대폰 메모장 신세를 질 때마다 내가 메모한 일정을 조만간 잊어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촌스럽단 핀잔을 듣더라도 벽걸이 달력을 향한 애정을 올해도 이어가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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