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 SK하이닉스 ‘패싱’ 우려…지자체 ‘감 놔라 배 놔라’

입력 2019-01-26 09:00수정 2019-01-27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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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청주·구미·용인·충남도 5파전…“정치적 논리로 진행돼선 안 돼”

120조 원이 투자되는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 조성 산업을 둘러싼 지방자치단체 간 유치 경쟁이 과열되고 있다. 정작 사업을 영위할 반도체 업계는 이 현안에서 사실상 ‘패싱’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애초의 취지와는 다르게 정치적 논리로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사업이 진행되면, 본래의 의미가 퇴색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해 12월 ‘제조업 활력 및 혁신 전략’을 발표하면서 10년간 120조 원을 투자해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이미 평택 고덕에 대규모 반도체 산업단지를 계획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의 핵심은 SK하이닉스로 꼽힌다. SK하이닉스는 경기도 이천 부지가 이미 포화상태라 추가 부지 확보가 필요한 상황이다.

문제는 반도체 클러스터를 유치하기 위한 지자체의 과열된 ‘핌피(PIMFY·Please in my front yard)’ 경쟁이다. 현재 반도체 클러스터 유치 전쟁은 이천, 청주, 구미, 용인, 충남도 등 5파전으로 확대됐다.

이천은 시장이 나서 기자회견을 열고 SK하이닉스 본사가 있는 이천에 반도체 클러스터가 조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천시의회는 결의문을 채택했고, 이천시민연대가 출범하며 거리행진까지 벌였다.

구미도 시의회가 결의문을 채택하고, 경북도·대구시와 손잡고 부지 무상 임대를 발표하며 유치에 나섰다. 이철우 경북지사는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를 만나 ‘SK 하이닉스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 구미 유치’를 적극 건의했다. 구미시의회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청주는 충북시장군수협의회가 건의문을 채택해 정부에 전달했고, 용인도 시장이 직접 나서 유치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충남도까지 합세해 유치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최태원 SK회장이 4일 SK하이닉스 신규 반도체 공장 M15 준공식에서 반도체 분야 투자를 지속해서 이어나가겠다고 말했다. (사진제공=SK하이닉스)

이를 바라보는 반도체 업계에는 우려의 시선이 가득하다. 반도체 클러스터는 1차적으로 정부 및 정부부처가 부지를 선정해 조성하다 보니 기업에는 선택권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조성한 산업단지에 무조건 들어갈 수도,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는 처지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입지에 가장 큰 이해관계가 얽힌 곳이 정치권이냐 정부냐, 아니면 그곳에서 실질적으로 사업을 영위할 기업이냐고 묻고 싶다”며 “의사결정에 가장 중요한 주체는 반도체 기업인데 선택권이 없어 상황만 바라보고 있는 현실이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반도체 시설 투자는 한 두 푼이 아닌 조 단위의 대규모 금액이 투자되다 보니 효율성과 경제성을 무시할 수 없다. 지자체는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막대한 자금을 정치 논리, 사회 환원 차원으로 접근해 집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지난해 사상 최대실적을 기록했지만, 작년 4분기부터 실적이 꺾인 SK하이닉스는 올해 반도체 장비투자를 40% 축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클러스터는 반도체 공장 하나 들어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지반, 물, 전기, 물류, 화학물질 공급, 장비 협의할 곳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데 이런 입지 조건을 갖춘 곳이 많지 않다”며 “단순 정치 논리로만 진행되어서는 안 되고, 지역 입장만 들어서 부지를 선정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가 개발한 2세대 10나노급(1y) DDR5 D램(사진제공 SK하이닉스)

부지 선정의 또 다른 걸림돌은 인재 유치다. 반도체 공장이 들어서면서 연구개발(R&D) 인력도 충원되어야 하는데, 우수 인력이 기피하는 지역에 회사가 들어가긴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반도체 부품 회사 관계자는 “우리 회사만 보더라도 지방 사업장에는 직원들이 오려고 하지 않는다”며 “평택도 안 가려 한다. 심리적 마지 노선이 수원, 수지, 기흥 정도까지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R&D 측면에서 취업 준비생들이 관심을 갖고 매력적인 지역이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지역이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볼멘소리도 나온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이 ‘산’으로 가기 전에 정부와 부처가 무게 중심을 잡아줘야 한다는 지적이다. 경쟁이 더 과열될 경우 유치에서 탈락한 지역의 기업 반감이 커질 수도 있고, 지자체 간 갈등이 격화될 우려도 있다. 정치권에서는 올해 총선을 앞두고 표심을 노린 정치인들이 정부부처와 반도체 업계에 접촉하며, 지역구에 클러스터를 유치하기 위해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 뒷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산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클러스터는 마치 올림픽 유치 경쟁을 하듯이 지방자치단체들이 들고 일어서고 있다. 장밋빛 전망만 바라보지 말고, 냉정하고 차분하게 환경, 교통에 미칠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며 “무엇보다 제조업 활성화라는 본래의 의미가 퇴색하지 않도록 사업 당사자인 반도체 업계의 의견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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