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의 만년필 이야기] 33, 비싼 것은 이유가 있다

입력 2019-01-2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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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연구소장

“TV는 왜 언제나 비싼 것일까?” 지난 일요일 TV를 보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답은 옛날 휴대전화, 일명 벽돌 전화기만 한 리모컨에 있었다. 값이 떨어질 것 같으면 새로운 기능을 추가한 신제품을 내놓아 값을 올리고 새로운 기능에 버튼 하나씩 추가되어 지금과 같이 버튼이 많은 리모컨이 된 것이다. 리모컨 버튼이 계속 추가되는 한 TV 값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TV보다 더 오래된 만년필은 어떨까. 만년필의 가격은 가장 중요한 부품인 펜촉이 비싼 금속인 금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비쌌다. 때문에 초기 만년필들의 가격과 이름이 정해질 때도 펜촉 크기로 좌지우지되었다. 예를 들면 워터맨사의 경우 펜촉의 크기가 작은 편인 2호가 달린 만년필의 이름은 2또는 12, 42, 52이었고 가격도 2달러였다. 따라서 가장 큰 크기에 속하는 8호 펜촉이 달린 것은 끝자리가 8로 끝나는 이름에 가격 또한 8달러, 가장 대표적인 것은 58이었다. 당시 8달러는 생산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평균 주급 정도였으니 꽤 비싼 가격이었다.

그런데 1920년 느닷없이 이 규칙을 깨며 혜성처럼 등장한 만년필이 있었는데 8.75달러 가격의 셰퍼 라이프 타임이었다. 셰퍼 라이프 타임은 어떻게 이 법칙을 깼을까? 라이프 타임이 성공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평균 5년이었던 보증기간을 사용자의 평생으로 확대하여 사용자가 마음 편히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평생 보증에 걸맞게 펜촉을 두껍게 만드는 등의 실질적 노력 또한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성공으로 만년필 세계는 딱딱한 펜촉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철옹성 같은 워터맨의 입지는 흔들렸다. 1920년대 중후반까지 셰퍼는 라이벌 파커와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기세 좋게 앞으로 뻗어나갔다. 손을 뻗으면 1등 워터맨이 곧 잡힐 것 같았다.

▲파커51의 광고.
하지만 1927년 셰퍼는 이 기세를 몰아 두 자리 가격인 10달러 만년필을 내놓는데 이번의 반응은 이전만큼 좋지 않았다. 1929년 시작된 대공황으로 경기가 좋지 않은 것도 원인 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 이번 것은 이전에 비해 혁신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성능과 모양이 라이프 타임 만년필에 색상만 살짝 바꾸어 값만 올렸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10달러 시대를 연 것은 1933년에 등장한 파커 버큐메틱이었다. 지난 10년간 파커는 듀오폴드의 성공을 바탕으로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라인을 과감히 줄이고 성장을 위한 발판을 다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반투명한 몸통에 잉크를 채워 잉크의 잔량(殘量)까지 확인할 수 있는, 당시로는 최신식에 해당하는 버큐메틱 만년필이었다. 잉크가 얼마 남아 있는지 보이지 않아 언제 잉크가 떨어질지 모르는 고무 주머니에 잉크가 채워지는 옛날 방식은 불안하고 불편했다. 반면 잉크의 잔량을 알 수 있는 이 방식은 꽤나 편리하고 혁신적인 것이었다. 결국 셰퍼, 워터맨마저 파커의 성공으로 생긴 이 유행을 따라 했으니 파커는 주도권을 잡아도 꽉 잡은 셈이었다.

파커는 이 기세를 몰아 12.5달러 시대 역시 자기의 무대로 만들고 싶어 했는데, 그 주인공은 공식적으로 1941년에 출시된 그 유명한 파커51이었다. 파커51은 펜촉이 아주 살짝 노출되어 있어 다른 행성에서 온 펜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특이한 외관이 먼저 눈에 띄었다. 그 덕택에 공기와 접촉하는 면이 적어 뚜껑을 한참 열어 놓아도 펜 끝이 마르지 않는 등 여러 장점이 많았지만, 사실 파커51의 가장 대단한 점은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것이다. 비행기를 탈 수 있으면 혹한과 혹서까지 견딜 수 있다는 것이고 현대 만년필은 이 세 가지를 견디는 것으로 보는데, 파커51은 그 세 가지를 가진 만년필 역사상 첫 번째 만년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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