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기자가 간다] 춥지만은 않았던 쪽방촌의 겨울…입동 전날 영등포쪽방촌 가보니

입력 2018-11-07 15:21수정 2018-11-07 17:25

  • 작게보기

  • 기본크기

  • 크게보기

▲영등포쪽방촌의 한 골목. 벽에는 자원봉사자들이 그리고 간 해바라기 그림이 그려져 있다. (유정선 기자 dwt84@)

몸이 으슬으슬 추워지는 겨울에는 아랫목이 생각난다. 어린 시절 시골 할머니 집의 아랫목은 보물창고였다. 절절 끓는 그곳에 몸을 누이면 한기가 사라지고 온몸에 온기가 돌았다.

아랫목의 이불을 들치면 그곳엔 구수한 냄새의 메주도 있었고, 손주가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할머니가 식지 말라고 놓아둔 밥그릇도 있었다.

겨울의 길목인 입동(立冬)이지만, 단풍나무가 물든 거리에는 아직 가을의 체취가 남아 있었다. 입동을 하루 앞둔 6일, 영등포역 인근의 영등포쪽방촌을 찾았다.

영등포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 그곳의 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높은 건물들 사이로 나지막한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쪽방촌이 보였다.

골목을 앞두고 발걸음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쪽방촌은 외부인과 단절된 그들만의 세상 같았다.

▲빨랫줄에 걸려 있던 '헬로 키티' 수건. 뽀로로 의자도 있었다. (유정선 기자 dwt84@)

쪽방촌 골목을 따라 5~6개의 방을 지나니 그곳에서 한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셨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방 안에서 "아이고"라는 곡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는 오랜만에 들려온 인기척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여의치 않은 눈치였다.

2평 남짓한 방 안에는 침대, 성인 두 명이 설 만한 싱크대, 가전제품 몇 가지가 눈에 띄었다. 침대에 앉은 할머니와 마주하고 방바닥에 앉으니 금세 방이 가득 찼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2~3켤레의 신발이 옹기종기 놓여 있었다. 할머니의 신발을 밟지 않게 조심스럽게 나의 신발을 포개 놓은 후 집으로 들어서니 훈훈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쪽방촌은 겨울나기가 힘들 거라는 생각과 달리 폭염과 눅눅한 습기가 함께 찾아오는 여름이 가장 힘들다고 했다.

할머니에게 지난여름 안부를 물으니 "아유 말도 말아. 이번 여름에 내가 하도 더워서…"라고 말하며 손사래를 쳤다. 할머니는 쪽방상담소의 도움으로 이번 여름 선풍기와 에어컨을 들였다. 에어컨 같은 가전제품의 경우 자주는 아니지만 간혹 후원이 들어온다. 이 할머니는 고령, 장애 등을 고려해 대상자가 됐고, 다행이도 올해 벽걸이 에어컨을 들여 놓을 수 있게 됐다.

▲2평 남짓한 할머니 방에 놓여있던 벽걸이 에어컨. 이번 여름 폭염에 지원받은 것이라고 했다. (유정선 기자 dwt84@)

에어컨은 기업 후원 물품이라고 했다. 쪽방상담소에서는 고령, 건강 상태, 장애 여부 등을 고려해 우선 대상자를 선정, 기업체에서 후원 물품이 들어오면 가구별로 배정한다.

영등포쪽방상담소 박철민 간사는 "후원은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 겨울이 되면 연탄이 주를 이루고 가전제품 경우도 간혹 있다"라며 "쪽방촌 하면 겨울이 가장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여름이 더 힘들다. 겨울에는 연탄을 태우면 되지만, 여름에는 냉방기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막연하게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개인으로 나설 만한 통로는 많지 않다. 실제로 기자가 연탄나르기 봉사를 신청하려고 한 사회복지단체의 봉사 일정을 체크해보니, '00기업' 'XX모임' 단위로 신청하는 경우가 주를 이뤘다.

박철민 간사에게 '쪽방촌에 도움이 되고 싶은데 개인 봉사로 신청을 하면 되느냐'라고 묻자 "자원봉사자분들 같은 경우 개인보다는 모임이나 단체 단위로만 받고 있다. 형평성을 고려한 문제다"라며 "그분들이 오셔서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을 위해 청소나 빨래 등도 해주시고 있다"라고 말했다.

할머니가 사는 집은 쪽방촌에서도 좋은 방에 속한다. 쪽방촌은 대개 1.2~1.5.평 내외다. 78살인 할머니는 쪽방촌에서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냈다. 할머니는 "쪽방촌과 함께 늙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라면서 지나온 세월을 회상하듯 작게 난 창문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즉석밥과 통조림, 간편식들이 눈에 띄었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에게는 겨울철 꼭 필요한 것들이다. (유정선 기자 dwt84@)

몸이 좋지 않아 정부 보조금 70만 원을 받지만, 식사는 급식소에서 대부분 해결하고 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쪽방상담소를 통해 기업 후원 물품과 장보기 서비스 등을 지원받는다.

박 간사는 "할머니 같은 경우는 고령에 장애도 있으셔서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지원받고 있다"면서 "10만 원 한도 내에서 장을 봐 드리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유일한 소득인 정부보조금은 주로 약값으로 사용한다. 쪽방촌은 집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집주인에게 월세를 지불하고 거주하고 있다. 할머니가 사는 집의 보증금은 400만 원이라고 했다. 월세는 40만 원이다. 이곳 쪽방촌의 평균 월세는 20만~25만 원 정도다.

서울의 쪽방촌상담소는 전부 5개다. 영등포를 비롯해 서울역, 남대문, 동대문, 종로 돈의동에 있다. 올해 모두 시립으로 전환됐다.

가전제품이나 식탁, 베개, 이불 전기장판 등은 호텔과 서울시가 연계해 지원을 받는다. 호텔은 주기적으로 물품을 바꾸기 때문에 시 차원에서 해당 물품을 후원받아 쪽방촌 거주민에게 지원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 집에는 대기업의 가전제품과 전자레인지, 즉석밥 등이 보였다. 이는 모두 후원받은 것이라고 할머니는 말했다.

대화를 마치고 할머니에게 "꼭 건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나갈 때 머리 숙여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쪽방촌의 문이 낮은 탓이다. 키가 170cm 넘는 기자는 허리를 굽혔지만, 결국 머리를 '쿵'하고 부대고 말았다.

할머니는 "아이고 조심하라고 했잖아. 멀리 못 나가요. 몸이 이래서"라며 짧은 만남에 아쉬운 기색을 보였다.

▲골목 어귀에 자리 잡은 한 의원의 문 앞에는 거주민들을 위한 여러가지 공지가 붙어 있다. (유정선 기자 dwt84@)

문을 열고 나서자 바로 골목이 눈앞에 나타났다. 길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벽화에 대해 묻자 "봉사자가 그려주고 갔다"라고 말했다. 지나는 길에 마주친 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네자 미소가 돌아왔다. 골목에 앉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아주머니는 "저번 언니(?)보다 낫네"라는 알 듯 모를 듯한 칭찬을 보내기도 했다.

물론 한쪽에서는 여전히 경계의 시선이 오가기도 했다. 낯선 이의 등장에 "뭐 하러 왔어요?"라는 퉁명스러운 물음을 건네는 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힐끔힐끔 쳐다보며 말을 붙이려는 눈치였다.

쪽방촌은 확실히 생각과는 달랐다. 골목 어귀에 자리 잡은 요셉의원 앞에는 문화 관련 공지가 붙어있었다. '이발소 운영 시간', '도서관 개방 시간', '영화 포럼 시간'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의원 앞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는 "쪽방촌 사람들이 아프면 들리는 곳"이라고 귀띔해줬다.

▲어지럽게 얽힌 전깃줄 사이로 가을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외부와 단절된 곳 같지만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관심과 세상의 따뜻한 시선이다. (유정선 기자 dwt84@)

짧은 시간이었지만 본격적인 겨울을 앞둔 쪽방촌은 온기가 감돌았다. 한편으로는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을 실천하려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 "아직까지는 살만한 세상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모든 쪽방촌에 온기가 감도는 것은 아니다. 사회의 관심이 계속 머물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쪽방촌을 나오며 그곳 한 귀퉁이 벽에서 마주친 시 한 구절을 작은 목소리로 읊었다.


저마다 지닌 상처 깊은 곳에 맑은 빛이 숨어있다

첫마음을 잃지 말자

그리고 성공하자

참혹하게 아름다운 우리

첫마음으로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뉴스
댓글
0 / 300
e스튜디오
많이 본 뉴스
뉴스발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