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찬국의 세계경제] 우리 경제정책, ‘터널시야’ 벗어나야

입력 2018-10-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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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대 무역학과 교수

5월에 타계한 미국 작가 톰 울프의 논픽션 ‘The Right Stuff’는 미국 최초 유인 우주 프로그램 참여자들과 테스트파일럿에 대한 이야기다. 1980년대 초 영화로 만들어져 ‘필사의 도전’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도 소개되었다. 테스트파일럿들은 1960년대 신형 전투기 개발을 위해 시제기(試製機)를 시험 비행하여 성능을 검증했는데, 사고가 잦아 일부 비행기에 ‘과부 제조기’라는 별명이 붙여지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성능을 측정하는 계기판 수치를 관제탑에 중계하는 것에 몰두하다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탈출하지 못해 사망하는 사고도 소개된다. 일종의 터널시야(視野) 현상이다.

경제에 대한 학문적 분석과 거시경제 정책을 평가하는 일은 각각 다른 접근 방식을 요한다. 전자의 경우는 특정한 가설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자료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일종의 테스트파일럿의 터널시야가 필요하다.

이에 비해 거시경제 정책은 고용과 같은 지표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효과를 관측하기 쉬우나 소기의 성과를 내는 것은 어려워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큰 여객기의 기장이 안전하게 행선지까지 운항하기 위해 계기판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기상 상황과 같은 정보를 취합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최저임금 인상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소득주도 경제정책이 논란이 많은데 언론에 보도된 이 정책 실험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발언을 보고 있으면 테스트파일럿의 터널시선이 연상된다. 올해 들어 저임금 근로자층의 고용 사정이 계속 나빠지고 있다. 우연히 올해 초부터 최저임금이 크게 올랐다.

두 가지 사건의 순서를 보면 인상이 고용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옹호론자들의 반응은 시각에 따라 학구적이거나 구차스럽다고 볼 수 있다. 인과관계의 증거가 확실치 않고, 전체 고용이 나빠졌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긍정적인 효과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증거가 확실치 않다는 것은 학술적 화법이다.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에 긍정적 효과를 미친다는 주장을 통상적 학술적 방법론에 따라 검증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대상이 되는 가설은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에 영향이 없거나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야 한다. 과학적 방법론에 따르면 주장하고 싶은 바가 틀렸음을 증명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데이터에서 틀렸다는 증거를 못 찾았을 때 비로소 자신의 주장이 맞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임금과 고용 자료를 통계적으로 검토했을 때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으면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설정한 가설이 틀린 것이 되며, 이는 동시에 최저임금 인상이 긍정적 효과가 있다는 증거가 된다. 정책 실험의 시간이 짧아 실제로 의미 있는 검증이 어렵다.

그런데 효과가 있었는지를 알기 위해 터널시야적 검증을 해야 한다면 이미 해당 정책은 거시경제 개선 용도로 사용하기에 적절치 않다. 바람직한 정책은 난기류에 진입하여 흔들리던 여객기가 기장의 경로 조정으로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것과 같이 쉽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정책에 대한 집착의 부작용이 우려된다. 벌써 장기적으로 각종 공식 통계자료의 신뢰성을 손상할 수 있는 무리한 통계청장 경질, 단기 일자리를 늘리기 위한 재정사업 확대, 공기업 인력 늘리기 등 억지로 성과 맞추기가 진행되고 있다. 지속 가능한 성과로 이어지려면 이런 마중물 사업이 민간 부문의 일자리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럴 기미가 없다.

더 큰 걱정은 실물 및 금융시장 사정이 점점 더 어려워지며 소용돌이 징후가 짙어지고 있는 나라밖 상황이다. 자칫 우리 경제가 휘말려 크게 흔들릴 개연성이 커지고 있는데 계기판에만 너무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지금이라도 계기판이 아니라 시야를 넓혀 한국 경제라는 대형 여객기의 경로를 어떤 방향으로 조정하면 난기류를 피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때다.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소득주도 성장론에 대해 비판적인 이유가 정치적인 고려 때문은 아니다. 물론 정치인들은 정치적 득실을 따져 입장을 정할 수 있다. 하지만 경제학자의 입장에서는 이 주장 내부의 경제적 논리의 빈곤과, 더 걱정스러운 선험적 증거의 부재를 치명적인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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