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를 이끄는 여성리더②] 나경원 "결정할 수 있는 자리 오른 여성 많아져야"

입력 2018-09-1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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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여성 최다선 의원, 국회 여성 의원 최초 외교통일위원장 역임, 서울대 법대 졸업한 판사 출신 의원, 한국 스페셜올림픽 위원회 명예회장….

나경원(55) 자유한국당 의원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들이다. '수식어 부자'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그를 소개할 단어들이 차고 넘친다. 이는 판사를 거쳐 정치권에 입문하고, 2005년 17회 국회 때 비례대표로 원내대표에 진출한 이후 지금까지 그가 얼마나 숨 가쁘게 달려왔는지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 의원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이투데이와 만난 날도 밀려오는 전화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모습이었다. 특히 이날 성행위 상대방, 주로 여성의 명시적 동의 없이 이뤄진 성관계는 일종의 성폭행으로 간주해 강간죄와 마찬가지로 처벌하는, '비동의 간음죄'를 인정하는 형법개정법률안이 나왔다. 나 의원은 여야 의원들에게 법안 발의에 함께 할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나경원 의원은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진행된 이투데이와 인터뷰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느꼈던 경험들을 토대로 사회를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오승현 기자 story@)

현재 차기 한국당 대표로 하마평에도 오른 그는 판사 경력을 바탕으로 차곡차곡 정치 경력을 쌓아가는 중이다. 매스컴을 통해 이 같은 모습을 보면서 늘 주류인 그의 길은 순탄했을 것만 같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자타공인 성공한 '워킹맘'인 그에게도 '여성' 혹은 '여자'라는 정체성은 수많은 고민을 하게 했다.

판사 시절에도 그랬고, 위원장 등 각종 직함을 달고 활동할 때마다 그랬다. 아이 둘을 키우는 여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는 게 절대 녹록지 않았다. 인터뷰 내 그가 내뱉은 단어에서는 그간의 고충들이 한둘씩 배어 나왔다.

"판사 시절에 아이가 아픈 적이 있어요. 병원에 갔다가 출근해야 했지만,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갔다가 늦는다고 말할 수 없었죠. 사실대로 말하면 '여자 판사는 어쩔 수 없다'라고 할 게 뻔했거든요. 그게 싫어서 제가 아프다고 했어요. 남자 판사들은 전날 술 먹어서 아침에 좀 늦게 나오면 술 무용담을 말하는데, 아이가 아파서 병원 갔다가 늦게 가면 손가락질 받아야 하니까요. 이런 일들은 수많은 여성이 겪어온 것이죠."

1995년 부산지방법원 판사로 임관했을 때 70여 명 부산법원 판사 중 여자 판사는 나 의원 한 명이었다. 판사 임관을 위해 면접을 봤는데 "여자 판사는 남자 판사들이 싫어하는 거 알지"라는 이야기도 노골적으로 들었다. "여자 판사와는 죽어도 일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성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지만, 성적과 무관하게 판사 인사 배치에서는 뒷순위였다.

"지금은 부장판사부터 좌우 배석이 모두 여자인 재판부도 있죠? 예전에는 '출산 휴가가 60일인데, 남자 판사의 업무가 과중하게 지워지니까 60일 다 쓰면 안 되는 거 알죠?'라는 면접 질문이 나왔다니까요. 제가 판사가 됐을 때는 여자 판사도 당직을 서기 시작했어요. 이전에는 여자 판사를 배려한다는 의미에서 당직을 안 주기도 했지만, 당시 당직 판사가 영장을 했거든요. 지금은 영장전담판사가 따로 있지만요. 여자에게 당직을 주지 않았던 기저에는 여자 판사에게 영장을 시킬 수 없다는 게 있는 거죠. 형사 재판부에도 여자 판사를 보내지도 않았으니까요."

▲나 의원은 "어쩔 수 없이 낙오된 사람들과 같이 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정치에 입문하게 됐다"고 밝혔다.(오승현 기자 story@)

한계를 겪었지만, 얻은 것도 참 많았다. 판사를 하면서 누군가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을 해야 했고, 그것들이 판례로 이어지면서 사회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판사로서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나 의원은 "사회를 바꾸려면 입법적, 정책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정치 입문 배경을 털어놨다.

"우리 아이의 경험, 그리고 우리 아이를 키우면서 느꼈던 경험들을 토대로 사회를 바꾸고 싶었어요. 아직 우리 사회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요. 사안을 바라볼 때 약자의 시각에서 보는 태도도 부족하죠. 가해자의 시각이 아니라 피해자의 시각, 주는 자의 시각이 아니라 받는 자의 시각, 강자가 아닌 약자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면 낙오된 이들도 함께 나아갈 수 있는데 말이죠. 어쩔 수 없이 낙오된 사람들과 같이 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제 정치철학의 뼈대를 이루는 것도 입문하게 된 배경과 맞닿아요."

하지만 성별이 주는 제약은 정치에 입문한 후에도 그대로 경험해야 했다. 나 의원은 "어느 직역에 있더라도 여자로서 똑같은 크고 작은 경험을 한다"며 "판사일 때나 정치인일 때 그 경험의 내용이 다르고 차별의 크기가 더 크거나 적을 수는 있지만, 여성이 출산, 육아, 가사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직업과 균형을 이뤄가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것 등에는 같은 맥락이 있다"고 말했다.

세상은 바뀌었지만, 정치권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것도 아쉬움이다. 나 의원이 정치권에 처음 입문했던 때부터 지금까지 여성 의원 수의 차이도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세상은 바뀌는데 국회는 그대로면 안 되죠. 이제는 여성에 대한 획기적인 변화가 있어야 해요. 상상할 수 없는 차별이 이뤄진 시대도 있었잖아요. 여성 의원 수는 반드시 늘어야 해요. 여성 의원 수가 뭐가 중요하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에 결정할 수 있는 지위의 여성들이 많지 않아서 여성에 대한 생각이 들어가지 않은 결정들이 이뤄지고 있잖아요. 여성 감수성이 너무나도 낮은 것 같아요."

좀 더 오래,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서 약자의 입장에 서야겠다고 결심한 나 의원. 그는 요즘 그 누구보다 여성 인권에 관심을 두고 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 페이스북에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나 의원은 최근 여야 여성의원 13명과 '비동의 간음죄'를 인정하는 형법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오승현 기자 story@)

'비동의 간음죄'를 인정하는 형법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 한 것도 법조 전문가로서 그가 내놓은 하나의 솔루션이다. 감정적 호소보다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나 의원은 "이제는 우리가 한 분 한 분 설득해 가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감정적 대응보다 논리적, 이성적 대응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나 의원의 적극적인 행동에 우려를 표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일각에서는 보수주의자의 변절이라고도 비판한다. 이에 대한 생각을 묻자, 나 의원은 "누구보다 남녀 갈등을 우려하고 있다"고 답했다. 다만,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했다. 그는 "여성이 출산으로 불이익을 받는 부분을 인정해주면서 남자들이 군대에 감으로써 불이익을 받는 부분을 인정해줬으면 좋겠다"며 "남자들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을 해소해줘야 한다. 본인이 피해를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 합리적인 가산점을 주면 남녀가 서로 '윈윈'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진정한 보수는 북한 인권을 얘기하면서도 우리 사회 약자의 인권에 대해 들여다봐야 해요.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개인의 인권을 중요시하는 거예요. 장애인 인권을 말할 때면, '자기 딸이 그러니까'라는 이야기도 듣곤 했죠. 하지만 기본은 그게 아니거든요. 전 꾸준히 장애인 인권과 약자의 인권에 관해 얘기를 해왔어요. 여성 인권도 그런 면에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두게 된 거고 강조하게 된 거예요. 저도 여성으로서 경험한 일들이니까요."

여성 정치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그가 꿈꾸는 '정치인 나경원'의 미래도 궁금했다. 특히 당대표 도전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의원은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당이 제대로 서는 것"이라며 "민주당 지지율이 떨어지는데 우리 당 지지율이 오르지 않고 있다"고 에둘러 답했다. 그런데도 그의 발언들 속에 '올드보이'가 아닌 '뉴걸'로서 우뚝 서고 싶다는 바람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회의 변화를 수용하고 변화 감수성이 높은 이들이 정치 전면에 나와야 미래 세대로 갈 수 있지 않을까요?"

▲나 의원은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가진 이유에 대해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하는 것이 보수이기 때문에 개인의 인권을 중요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오승현 기자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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