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달자의 햇살과 바람] 아들만 챙기던 우리 엄마

입력 2018-08-02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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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몇 번 글로 썼던 일이나 여름 수박을 보면 다시 그 일들이 강하게 떠오른다. 어머니는 아들이 둘이었다. 첫딸 다음으로 아들을 얻고 그 뒤로 딸을 다섯이나 낳고서야 아들 하나를 더 얻었다. 장손의 며느리였던 어머니는 층층시하에서 아들이 적은 책임을 혼자 져야만 했다. 그런 불안한 시기에 1950년 전쟁에서 큰아들을 잃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자원 입대한 아들이 안양 근처에서 적의 총을 맞았던 것이다. ‘하늘이 노랗다’ 그것은 너무 약하고 ‘청천벽력?’ 그것도 너무 약하고 어머니의 절망을 표현할 말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 당시 보름을 그 아들의 무덤 앞에서 내려오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때부터 하나 남은 아들에게 어머니는 전 생애를 걸었다. 아버지가 귀가하지 않는 날이 많아지고 어느 여자에게서 자식을 얻었다는 말이 들려올 때면 그 공포와 분노가 모두 남은 아들에게 집착의 사랑으로 덩어리가 커져만 갔던 것이다.

그 아들은 바로 내 아래였다. 세 살 차이의 나도 분명 어린아이였지만 모든 사랑과 관심을 아들동생에게 빼앗겨 분통 터지는 날이 헤아릴 수 없었다. 특히 먹는 것으로 어머니는 날 울게 했는데 부엌 귀퉁이 석쇠에 불고기를 구워 아들 입에만 오냐오냐하며 먹였던 것이다.

멀리서 고기 냄새에 배가 아팠던 기억이 뚜렷하다. 어린 날 나는 수박을 좋아했다. 그 뿐인가, 동생이 까먹는 삶은 계란에 한이 맺혀 부산에서 하숙할 때 계란 열 개를 사다 한꺼번에 다 먹고 배탈이 난 일도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는 여름이 되면 큰 수박 두 통을 사셨다. 그것을 잘라 다 같이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라 한 통을 그대로 위만 자르고 숟가락으로 아들에게 퍼 먹게 했고 한 통은 몇 가닥으로 잘라 한 토막씩 딸들에게 나누어 먹였다. 나는 수박을 베어 먹은 적이 없다. 너무 아까워 아이스케이크처럼 조금씩 빨아 먹었던 것이다.

그 당시 나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수박 한 통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어머니 생명이었고 그 모든 것이라는 것을 다 이해했지만 수박 문제만은 용서가 되질 않았다. 어머니를 미워했고, 어머니는 무식해서 아들을 편애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다시 태어나듯 변하시기 시작했는데 딸들도 교육 받지 않으면 자신과 같이 억울하게 산다는 것을 신앙처럼 믿고 셋째 딸부터 고등학교를 깡 시골에서 외지(外地)인 마산, 부산으로 유학을 시켰던 것이다.

1954년부터다. 경천동지(驚天動地)라 했던가. 동네 사람들도 모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공부해라, 제발 똑똑하게 살아라가 가훈이 되게 했던 것은 어머니의 선견지명(先見之明) 덕분이었을 것이다.

딸들은 자연히 자강불식(自强不息)을 배우게 되었지만 어머니는 스스로를 누르고 산 한의 지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지금도 그 어린 시절의 내가 내 안에 울고 있어서일까. 삶은 계란과 수박을 지금도 게걸스럽게 먹는다. 그렇게 먹고 싶은 수박과 계란을 마음대로 먹으니 나는 성공한 인생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웃으면서 계란과 수박을 먹으며 어머니를 미워한 나 자신을 다시 미워하게 된다. 어떻게 그 세월을 사셨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녹는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어머니의 삶을 내 아무리 시에다 수필에다 옮겨 적는다 한들 그것은 어머니 생의 겨우 한 페이지도 되지 못한다는 걸 나는 안다. 그렇다. 그것은 겨우 모래 한 주먹만도 못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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