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골퍼] “세계적 선수 보유한 만큼… KLPGA ‘글로벌 넘버원’ 욕심”

입력 2018-05-25 11:12수정 2018-05-2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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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자프로고퍼 1호 강춘자 KLPGA 수석부회장

▲강춘자 KLPGA 수석 부회장

“올해로 ‘40’이라는 불혹의 나이를 넘겼으니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겠죠. 국가의 경제력이나 경쟁력이 뒷받침돼야 하겠지만 2028년에 우리 협회는 글로벌 넘버원 투어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국내 여자프로골프 1호인 강춘자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수석부회장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와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투어에 비해 대회 수나 상금 규모에서 뒤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계적인 선수들을 보유한 만큼 ‘넘버원 KLPGA’에 대한 욕심이 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강 부회장은 “협회가 조직 체계의 지속 혁신을 비롯해 대회 경쟁력 및 글로벌 파트너십 강화, 사회적 책임 실현이라는 4대 전략을 수립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2025년에는 일본을 따돌리고 LPGA와 함께 양대산맥을 형성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가 골프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76년. 고 3 때 취업을 고민하다가 뚝섬경마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과천으로 이사를 가면서 ‘서울숲’으로 변한 뚝섬경마장은 경마 트랙 내에 9홀짜리 코스와 연습장을 갖고 있었다. 어깨 너머로 골프를 보다가 헤드프로인 조태호에게 레슨을 받았다. 중학교 시절에 배구를 했던 것이 나름 도움이 됐는지 골프와 금방 익숙해졌다.

“한국프로골프협회에서 여자프로 골퍼를 발굴하고 육성을 위해 선수를 모집하길래 지원을 했죠. 처음에는 8명이 모였는데 힘들었는지 다 그만두고 저 혼자 남았어요. 손이 얼얼하고 까져 피가 나면 반창고를 붙이고 수천 번을 휘둘렀지요. 2년 동안 죽기 살기로 했죠.”

1978년 5월 25, 26일 이틀 동안 프로를 선발하는 테스트가 열렸다. 경기 남양주시 레이크우드 컨트리클럽에서 남자프로의 월례경기에 묻어서 했다. 13명이 출전했다. 70타대를 치면 합격하는 선발전이었다. 최종일 17번 홀까지 3명이 동타였다. 강춘자가 18번 홀에서 버디를 잡아 1위로 합격했다. 타수는 11오버파 155타였다. 한명현과 구옥희가 1타 차로 공동 2위였다. 그런데 회원번호는 한명현이 백 카운트로 2위가 됐다. 안종현이 4위로 합격했다.

“지금이야 흔한 것이 골프클럽이죠. 테스트 때 골프채도 없어서 골프연습장 회원 부인의 클럽을 빌려서 출전했습니다. 풀세트를 써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지요. 연습할 때도 남자클럽의 하프세트로 사용했으니까요. 당시에는 윌슨 클럽과 던롭 DDH 스몰볼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샌드웨지를 테스트 때 처음 써 봤다. 연습 때는 벙커에서 주로 9번 아이언을 사용했다. 샌드웨지로 벙커샷을 할 때 너무 쉽게 볼이 탈출해 놀랐다고 한다. 그는 골프화도 없어서 빌려서 나갔다. 사이즈가 작아 뒤꿈치가 까져 피가 줄줄 흘렀다. 너무 아파 3번 홀부터 다음 홀로 이동할 때는 아예 골프화를 벗어 들고 다녔다.

2회 프로테스트는 1978년 8월에 열렸다. 이때 협회 초대회장을 맡은 김성희와 이귀남, 배성순, 고용학이 합격해 8명으로 늘었다. 반면 남자프로는 80명이었다.

“첫 대회는 한장상 전 KPGA 회장님이 만들어 주셨어요. 스폰서를 구해서 총상금 50만 원을 걸고 한원골프장에서 열렸는데, 제가 우승했죠.” 이때만 해도 여자대회는 남자대회에 얹혀서 했다. 여자는 남자 상금의 10%인 100만 원에 불과했다.

KPGA에서 10년 동안 여자프로부에 있다가 1988년 12월 KLPGA는 창립총회를 개최하면서 독립했다. 여자프로부 부장이었던 김성희가 회장, 한명현이 부회장, 강춘자가 전무를 맡았다.

“협회 전무를 하면서 1996년까지 선수 생활을 병행했죠. 그러다가 선수 생활을 접고 2011년부터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에게 ‘여자프로 1호’는 명예이자, 짐이다. 협회를 잘 이끌어 가면 본전이다. 하지만 조금만 잘못해도 1호라는 이유 하나로 후배인 회원들에게 온갖 불평불만을 모두 들어야 한다. 한때 너무 힘들어 내려놓으려고도 했지만 여자프로골프 발전의 대명제와 사명감 때문에 오기가 발동해 쉽게 그만두지 못했다고 한다.

“제 카카오톡 프로필에 ‘골프사랑’을 적어 놓았죠.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협회일에 전념할 때 우리 선수들이 국내외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하고 늘 고민했습니다. 선수들이 부진한 모습을 보면 ‘왜 안 될까, 어떤 부분을 도와줘야 할까’ 하는 것 등등이죠.”

이 때문에 그는 365일 경기장에서 살다시피 한다. 골프하고 결혼(?)했다.

초기에 상금은 어디서 구해 와 대회를 개최했을까.

“일등공신은 김성희 초대회장님이죠. 1965년에 골프를 시작한 김 회장님은 골프 유학까지 갔다 올 정도로 골프에 열정이 넘치는 분입니다. 초기에는 상금 마련을 위해 김 회장님의 인맥을 총동원해 골프장 소속 숙녀회에서 상금을 구걸하다시피 해서 대회를 치렀어요. 특히 남자대회 마지막 조로 경기를 할 정도로 보잘것없었죠. 일부는 남자대회 상금을 쪼개서 마련하기도 했고요. 기억에 남는 것은 1983년도에 한 시즌 5개 대회를 제가 모두 우승했는데, 상금을 모아 보니까 겨우 970만 원이었습니다.”

국내 선수들이 미국이나 일본에 진출해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는 데는 협회가 큰 역할을 한다. 그 중심에 강춘자 수석부회장이 있다는 얘기다.

“우리 선수들이 기량이 뛰어난 것은 끊임없이 경쟁을 해야 하는 시스템 덕이죠. 2005년 드림투어와 점프투어를 창설했는데 선수들이 1부 투어에 들어오기 전에 2, 3부 투어에서 1년 정도 의무적으로 뜁니다. 생존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는 거죠. 시간이 지나면 자신도 모르게 기량이 늘어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압니다.”

그는 우수한 선수가 나오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태산이다. 스타 선수들이 외국으로 자꾸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신인은 2년 동안 의무적으로 뛰어야 한다는 규제 조항이 있었다. 하지만 선수의 앞길을 막는 것 같아 규제를 풀었다. 그나마 스타들의 뒤를 이을 신인들이 계속해서 나와 줘서 다행이다.

“KLPGA투어도 흥행이 돼야 합니다. 뛰어난 선수가 외국으로 진출하면 그 자리를 누군가는 채워 줘야죠. 이를 위해 올해부터 2부인 드림투어의 시드를 20명 더 확대했습니다.”

글로벌 투어를 목표로 KLPGA는 외국 선수들에게도 문호를 활짝 열어 놓고 있다. 우리 선수가 LPGA나 JLPGA투어로 진출하는 것처럼.

“협회는 ‘신데렐라 프로젝트’를 운영합니다. 인터내셔널 퀄리파잉을 통해 KLPGA투어에서 뛸 외국 선수들을 선발하는데 올해로 4회째를 맞았어요. 작년까지 태국에서 41명이 출전했고, 올해는 100명 이상이 지원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2명이 10개 대회에 출전 자격을 얻어 올 시즌에 이미 3개 대회에 출전했죠.”

강춘자 수석부회장은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해야 할 무거운 과제를 안고 있다. 국내 선수들을 외국에 진출시키는 것이 목표이지만 외국에서 활동하는 선수들도 국내 투어에 보다 많이 출전할 수 있는 구조를 어떻게 만들까 하는 것이 문제다.

“상금을 증액하고, 대회 수를 늘리고, 투어의 질을 높이면 LPGA나 JLPGA투어에서 뛰는 선수들이 KLPGA투어에 더 많이 출전하겠지요. 이런 선순환 구조를 만든다면 KLPGA가 추구하는 ‘아시아 허브’, 미래에 우리 투어가 글로벌 넘버원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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