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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의 손편지] 농촌의 건강한 에로티시즘
입력 2018-05-17 10:40

요즘 농촌에서는 논에 물대기가 한창이다. 작년 이맘때는 가뭄이 유난히도 심해 수십 년 전통시장을 지켜온 농약사 사장님까지 “에휴, 올봄엔 가뭄이 월매나(얼마나) 지독한지 풀약(제초제)도 안 팔려유”라고 푸념하시곤 했는데, 올해는 때마침 반가운 비가 내려주어 모두들 한시름 놓은 표정이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순식간에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잡초들이 무성하게 올라올 것이다. “농사는 풀과의 전쟁”이라는 말을 매해 실감하건만 이 전쟁에선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필승 전략은 언감생심 엄두조차 못 내고 대신 “올해는 제발 작년보다 조금만 나와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애원하고 있다.

농민을 괴롭히는 잡초 중엔 ‘며느리밑씻개’라 불리는 풀이 있다. 논둑이든 밭둑이든 장소 불문하고 기막히게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하는 얄궂은 이름의 이 풀은 어린 소나무 묘목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휘감아 고사(枯死)시키는 저력(?)이 있다.

둔덕을 덮어버린 며느리밑씻개를 비 온 뒤 거둘라치면 영락없이 손등과 팔 곳곳에 생채기가 난다. 원뿌리를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촘촘하게 뿌리를 내리는 것은 물론, 줄기엔 날카롭고 끈적거리는 털이 송송 나 있어 맨손으로 뽑다가는 털에 긁혀 상처를 입기 일쑤다. 시어머니 눈에 며느리가 얼마나 밉살스러웠으면 줄기를 스칠 때마다 생채기를 내는 풀잎으로 밑씻개를 했으면 좋겠다는 엽기적 생각을 했으랴 싶어 마음이 짠하다.

지금도 여전히 초보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진짜 초보 농사꾼 시절엔 걸핏하면 호미나 낫을 밭에서 잃어버렸고, 분명 아랫밭에 있으려니 했던 전지가위나 톱을 윗밭에 두고 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럴 때마다 마을 어귀의 이장님 댁으로 이것저것 빌리러 가곤 했는데, 참다못한 이장님께서 “원래 농촌에선 마누라는 빌려줘도 농기구나 농기계는 안 빌려주는 법”이라 말씀하신다.

농촌 일이라는 건 때를 놓치면 ‘말짱 헛일’인데 농기계를 빌려주었다가 정작 본인이 써야 할 때 쓰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여간 낭패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게다. 게다가 행여 고장이라도 나면 이웃 간에 얼굴을 붉힐 수도 없고 이래저래 빌려주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말이다. 농기구 안 빌려주려는 이유는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왜 마누라는 빌려줄 수 있다고 하는 겐지….

하기야 마을 어른들 말씀을 귀동냥하다 보면 은근히 에로틱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고구마 심을 때 골을 얼마만큼 타야 하나요?” 여쭈어 보면 “글씨, 아가씨 젖무덤만 하게 해야 하나, 아줌마 엉덩짝만 하게 해야 하나?” 하늘을 바라보며 딴전을 피우는 등 정작 묻는 질문엔 시원하게 답을 해주지 않는다.

밭에 심어 놓은 채소가 시들시들 말라가거나 열매가 쭈글쭈글 비틀어지면 “말 못하는 것만으로도 서러울 텐데… 혼자만 먹지 말고 비아그라(영양제) 듬뿍 치라고” 라고 거들기도 하신다. “마누라 위해 비아그라 먹는 놈 한 놈도 못 봤다”라는 후렴까지 덧붙이시면서.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내온 건강한 에로티시즘을 엿볼 때마다 슬그머니 미소가 번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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