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의 독서산책] 이덕주 ‘스크랜턴’

입력 2018-02-2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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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조선 땅을 밟은 어머니와 아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헨리 아펜젤러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다. 언더우드는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연희전문을 만든 사람이고, 아펜젤러는 북감리교 파송 선교사로 배재학당을 세운 사람이다. 세월이 흐르면 많은 것들이 잊히듯 한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의 기여도 그렇다. 이 두 사람 못지않게 크게 기여한 인물이 아펜젤러와 함께 내한하였던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다. 의료 선교사였던 스크랜턴은 아펜젤러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업적을 남긴 사람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와 함께 한국에 온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이화여대 창립자이다.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가 쓴 ‘스크랜턴’은 어머니와 아들의 조선 선교 이야기를 다룬 평전 성격의 연구서다. 10년이 넘는 기간의 탐구 과정을 거치고 나온 책답게 웬만한 사람들이 해낼 수 없는 역작이다. 특히 이 책의 가치는 철저한 고증과 치밀한 탐구로 우리 사회에서 거의 잊힌 인물로 통하는 윌리엄 스크랜턴의 인생을 복원해낸 것이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예일대를 졸업하고 뉴욕의과대학을 나온 의사로,19세기 미국의 최상류층이었기에 안락하게 삶을 보낼 수 있었던 인물이다. 어머니의 권유로 어머니를 따라 아내, 두 살배기 딸 그리고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1884년에 한국 땅을 밟았다. 오늘날 서울 남대문시장 근처에 있는 상동교회가 그가 세운 교회다.

윌리엄 스크랜턴의 가장 큰 공적은 박애 정신을 바탕으로 ‘찾아가는’ 진료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당시 외국인과 양반들이 살던 정동에서 시병원(施病院)을 운영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애오개, 남대문, 그리고 동대문 등에도 진료소를 차리고 소외된 자들을 치료하는 일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그가 세웠던 진료소 가운데 하나인 애오개 진료소에 지금 우뚝 서 있는 교회가 바로 감리교 소속의 아현교회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선교사들이 교단에 보낸 보고 형식의 편지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 보고용 편지에서 조선 말엽 이 땅의 모습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이화학당을 다니던 어린 여학생들의 모습은 학교가 문을 연 지 몇 해 되지 않았을 때 선교 본부에 보내기 위해 찍은 사진에 등장한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이 땅의 여성들이 놀라운 성과를 내는 것처럼 어린 나이의 이화학당 학생들이 얼마나 똘똘하게 생겼는지, 나도 모르게 “한국 여성들은 참 특별하다”라는 감탄사가 나왔다.

집념을 갖고 연구에 임하면 잊힌 인물이라도 합당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깨달음을 새삼 얻은 책이다. 나이 52세는 당시엔 노인 중에서도 노인이었다. 그러나 아들을 설득해 그 나이에 오지 중의 오지였던 조선 땅을 밟고 이화학당을 세운 메리 스크랜턴 여사의 삶에도 깊은 존경심과 감사함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한국과 미국 관계가 복잡하기도 하고 어지럽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 근현대기에 영토적 야심을 갖지 않고 한국을 동등하게 대해 주었던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은 한국의 근대화에 참으로 큰 기여를 했다. 세월이 흘러 많은 것들이 잊히고 말지만 이덕주 교수의 훌륭한 작업이 잊힌 과거를 복원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작품을 선물하였다.

스크랜턴 모자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한국의 초기 개신교 선교 역사에 대한 부분, 그리고 그 시대 우리 사회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매우 큰 가치가 있는 책이다. 두툼한 분량이긴 하지만 도전해볼 만한 멋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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