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론] 서울예술단과 ‘굳빠이 이상’의 차원 이동

입력 2017-09-29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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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에 존 케이지는 ‘4분33초’를 작곡했다. 피아노를 위한 연주곡인 이 곡은 세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는데 악보에는 TACET(연주하지 말고 휴식할 것)이라고 쓰여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상상해 보자! 1952년에 연주자가 4분 33초 동안 피아노 앞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퇴장하는 모습을. 당시 음악계에 충격적인 반란이었을 것이다.

존 케이지는 방음(防音) 스튜디오 안에서 자신의 몸에서 나는 소리일 수도 있는 미세한 소리를 듣고 친구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텅 빈 흰 그림에 스치는 그림자를 보고 소음도 음악일 수 있고 예술은 우연하고 불확실한 창의성임을 깨닫고 ‘4분33초’를 통해 용기 있게 부르짖은 것이다.

1958년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철학과 음악을 전공하던 청년 백남준은 당시 실험음악의 본고장인 다름슈타트의 한 음악 강좌에서 존 케이지를 만났고 우연하고 불확실하며 소통하는 예술에 대한 새로운 길 찾기에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백남준은 더 이상 악기를 연주하지 않았다. 연주회장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부쉈고 객석에 앉아 있는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랐다. 그렇게 백남준은 새로운 음악의 표현 방식을 선언하며 행위 음악의 창시자가 됐다. 또 현대 미디어아트의 산실이었던 플럭서스의 주요 멤버로 예술 표현에 새로운 매체를 과감히 접목하며 비디오아트의 창시자가 되었다.

백남준에게 미디어 기술은 단지 도구가 아니었다. 그는 테크놀로지(기술)를 사고와 정신의 매체이며 예술 표현의 본질인 생명과 소통하는 매개체로 여겼다.

인간은 나날이 발전하는 도구와 함께 진화해왔다. 예술에서 새로운 매체의 활용은 선택적 활용이 아니라 필연적이고 총체적 삶의 표현일 것이다.

최근 체험형 테마파크에서는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체험이 자연스럽다. 이제 두 개념을 합친 혼합현실(MR)까지 체험할 수 있다. 몸에 부착하는 전자기기인 웨어러블 디바이스(Wearable Device)는 이미 우리 생활 속에서 새로운 차원의 공간을 만나게 해준다. 새로 지은 주택들은 사물인터넷으로 집 안의 생활용품들을 원격조종하고 제어할 수 있다. 우리는 더 편리하고 더 효율적이고 더 스마트한 일상을 점점 누리고 있다.

이런 시대에 공연은 누구를 대상으로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야 할까? 이 의문 한가운데 ‘굳빠이 이상’이라는 신선한 공연이 있다. 서울예술단이 최근 세계적 트렌드인 ‘이머시브 씨어터’를 내세우며 서울예술단의 트레이드 장르인 가무극을 새롭게 표현한 공연이다.

실제 존재했다는 자신의 데드마스크를 찾아 헤매는 시인 이상의 이야기다. 13인의 주변 인물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찾는 육체의 이상(身), 내면과의 충돌로 혼란스러운 감각의 이상(感),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바라보는 지성의 이상(知)으로 자아가 나뉜 3명의 이상과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금홍, 김기림, 박태원, 변동림, 김유정 등 이상의 지인들, 그리고 이상의 데드마스크인 듯 흰 가면을 쓴 100명의 관객이 등장인물이다. 배우들은 관객 사이를 종횡무진 뛰어다니고 관객들도 극의 구성 요소로 무대를 채운다.

오루피나 연출과 김성수 음악감독과 예효승 안무감독은 블랙박스 공간 전체를 완벽하게 장악하며 공간 너머 가상의 공간을 창조한다. 기호와 같고 건축과 같고 그림과 같은 이상의 초현실적 시들은 배우들의 몸짓과 타이포그래피를 형상화한 영상 맵핑과 회화와도 같은 조명이 조화에 힘입어 입체적 행위로 부활한다. 이상 시의 고유성을 이렇게 잘 묘사한 공연이 또 있을까?

급변하는 새로운 시대에, 이제 융합은 예술의 한 장르다. ‘이머시브 가무극’도 그 완성을 보여줬으니 이제부터 존재하는 장르다. 애초에 우리 연극은 열린 무대에서 자유롭게 관객과 소통하는 종합예술이었다. 부활한 이상처럼 원초적인 우리 연극성에서 미래 예술로까지 공간을 확장하는 이 공연을 공공자금으로 운영되는 서울예술단이 제작한 점에 박수를 보낸다. 비로소 서울예술단의 정체성에 걸맞은 레퍼토리 모델을 목격해 눈과 심장이 쾌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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