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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인물사전] 198. 화순옹주(和順翁主)
입력 2017-09-15 10:12
남편 따라 목숨 끊은 조선왕실 유일한 열녀

▲충남 예산의 화순옹주 정문(旌門).

화순옹주(和順翁主·1720~1758)는 영조의 둘째 딸이며 정빈 이씨(1694~1721)의 소생이다. 2세 때 어머니 정빈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9세 때에는 한 살 위인 오라버니 효장세자(추존왕 진종·1719~1728)마저 세상을 떠났다.

화순옹주는 13세 때 동갑인 경주 김씨 판돈녕(判敦寧) 김흥경(金興慶)의 넷째 아들 김한신(金漢藎·1720~1758)과 결혼하였다. 김한신은 그의 집에서 관례를 치르고 뒤이어 월성위(月城尉)라는 부마의 작호를 받았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어진 도위(都尉)와 착한 옹주”라고 했다. 그러나 김한신이 1758년(영조 34) 1월 4일 39세의 나이에 갑자기 병사하자 화순옹주는 남편의 죽음을 지나치게 슬퍼하여 남편을 따라 죽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음식을 끊었다. 이에 부친인 영조가 직접 찾아가서 위로하며 음식을 권하고 다시 장문의 편지를 보내 타이르기도 하였으나 끝내 옹주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다. 결국 음식을 끊은 지 14일 만에 화순옹주는 자진(自盡)하였다. 영조는 한 달 사이에 딸 화순옹주와 사위 김한신의 죽음으로 크나큰 슬픔의 고통을 받았다.

사관은 옹주의 절조를 극찬하였으며, 예조판서 이익정(李益炡)은 화순옹주의 정려(旌閭)를 청하였다. 영조는 자식으로서 늙은 아비의 말을 듣지 않고 먼저 죽었으니 정절은 있으나 불효라 하여 정려를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정려는 정조 때에 와서 세워졌다. 정조는 고모 화순옹주의 종사(從死) 행동이 왕실에서는 처음으로 있는 열행(烈行)이라며 극찬하였다. 1783년(정조 7)에 충청도 예산에 있는 화순옹주의 집 마을 어귀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하였다. 화순옹주는 남편 김한신이 죽자 왕녀의 신분으로서 유일하게 남편의 뒤를 따라 자진했던 것이다. 아마도 어머니 정빈 이씨가 일찍 세상을 떠나 어머니 없이 자란 슬픔, 오라버니 효장세자의 죽음, 자식 없음, 자신의 병약 등 외롭고 어려운 상황에서 화순옹주는 사랑하는 남편마저 갑자기 죽자 따라서 죽기를 결심하고 14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해하다가 끝내 순절하였을 것이다.

월성위 김한신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증조부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하였다. 특히 글씨를 잘 쓰고 시문에 능했으며 전각에도 뛰어났다. 그는 영조의 부마가 되었는데도 항상 겸손하고 검소하였다. 그가 39세의 나이로 병사하자 영조는 매우 슬퍼하며 정효(貞孝)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그는 슬하에 자녀가 없어 맏형 한정(漢楨)의 셋째 아들 이주(頤柱)를 후사(後嗣)로 삼았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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