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인문경영] 엘리트 vs 이리떼

입력 2017-07-3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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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능력 갖춘 인간지능형 리더

대학시절, L교수는 “이리떼가 되지 말고 엘리트가 되라”고 강조했다. 엘리트는 ‘뽑힌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리떼란 elite를 발음대로 읽은 것이다. 가슴 없이 머리만 발달한 리더는 이리떼처럼 유해하다는 경고였다. 요즘 말로 인공지능형보다 인간지능형 리더가 되라는 얘기다.

인공지능은 데이터만을 축적해 기계적으로 처리한다. 인간지능은 맥락화해 감정이 흐르게 한다. 선민(選民)이 민중보다 앞서는 선민(先民)만 하려 들면 엘리트가 아니라 이리떼로 추락한다. 엘리트에게 힘은 의무를 위한 이기(利器)다. 이리떼에게 힘은 권리 행사를 위한 흉기다.

최근 종근당의 이장한 회장, 미스터 피자의 정우현 회장,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황제 장화 등 갑질 논란을 보며 ‘엘리트 vs 이리떼’를 되새겨본다. 기득권층의 갑질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혹자는 그들의 공감력 부재, 긍휼감 결핍 등을 논한다. 2세 경영자의 자질 논란으로 비약시키기도 한다. 금수저보다 흙수저 출신이 서민의 아픔을 안다고도 말한다. 과연 엘리트와 이리떼 유형 인물은 처음부터 유전 형질이 다를까.

#갑질은 을에 대한 선택적 작동

그렇지 않다. 올챙이도 개구리가 되면 힘든 시절을 잊어버린다. 갑질의 모진 인물도 친지에겐 어진 사람인 경우가 많다. 갑질은 전천후 공감마비가 아니라 선택적 작동이다. 갑질형 인간이라고 공감불능이 아니다. 네 편, 내 편을 갈라 존중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다르게 대우할 뿐이다. 자신의 기준, 문지방을 넘은 동류에 한해서만 선택적으로 감응할 뿐이다.

권력은 공감력을 가두리 양식한다. 우리 안에 들어온 ‘우리’만을 사람으로 인식케 한다. 뇌과학자들은 “인간의 뇌의 작용에서 흥미로운 것은 뉴런이 자신과 유사한 존재의 행동을 볼 때만 공감하는 반응을 일으킨다. 뉴런은 어떤 대상이 자신과 같은 속성을 가진 개체가 아니라고 판단하면 그 대상의 움직임을 바라볼 때는 공감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유유상종인가 상종유유인가

맹자 ‘양혜왕(梁惠王)’의 ‘곡속(觳觫)’장을 보면 왕이 종(鐘)을 만들기 위한 희생용으로 소를 도살장에 끌고 가는 모습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왕은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며 무서워서 벌벌 떠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명한다. 소나 양이나 죽이는 것은 마찬가지다. 불인지심(不忍之心)의 감정이입이 작용한 것은 직접 ‘보고 안 보고’의 차이다. 자주 접해야, 가까이서 대해야 감정이 이입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리더의 공감력에도 적용된다.

‘갑과 을’은 육십갑자에서 유래된 것으로 우열-강약 개념은 없다. 어원은 오늘날의 의미와 통한다. 갑(甲)은 갑옷을 뜻한다. 을(乙)은 생선 내장 모습과 연관 있다. 강자의 갑옷은 성공력을 끌어올린다. 반면 공감력을 잃게 한다. 약자인 을은 내장마저 내놓고 살아야 하는 처지다. 갑은 을의 이 같은 비루함을 헤아리기 어렵다.

갑질로 말썽이 나면, 해당 인물들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언행인 줄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만은 아니다. 엘리트가 이리떼로, 마음에 갑옷을 두르지 않으려면 을을 사물이 아닌 사람으로 접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을에 대한 역지사지(易地思之)는 공상과 배려에서 나오지 않는다. 접촉의 밀도와 온도, 강도에 비례한다.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갑끼리만 휩쓸리지 말라. 공감 경화증에 걸리면 공감은 굳어지고, 마음갑옷은 딱딱해진다. 을과도 어울려 같은 유가 되려는 상종유유(相從類類)의 말랑말랑한 역발상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유유상종하고 있는가. 상종유유하고 있는가? 끼리끼리 휩쓸리는가, 사이사이 어울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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