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칼럼] ‘분노 조절 장애 범죄’ 유감

입력 2017-06-22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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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분노 조절 장애로 인한 ‘묻지마 범죄’ 소식이 잇따라 들려와 가슴이 휑하게 뚫리는 기분이다. 아파트 외벽 작업자가 켜 놓은 휴대전화 음악 소리가 시끄럽다며 밧줄을 끊는 바람에 5명의 자녀를 둔 가장이 목숨을 잃었는가 하면, 이번엔 인터넷 수리 요청을 받고 방문한 수리기사를 향해 통제되지 않은 분노를 폭발시켜 애꿎은 목숨을 빼앗은 사건이 발생했다니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층간 소음 논쟁에 보복 운전 분쟁이 가열되더니 ‘묻지마 살인’까지 지면을 장식하고 있는 요즈음,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범죄가 뜨거운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렇다 보니, 법률적인 차원의 강력한 제재 못지않게 사회·문화적인 차원의 자정(自淨) 노력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분노 조절 장애 범죄의 원인을 논하면서 극도의 불안 심리나 스트레스, 충동 조절 장애 등 개인적인 요인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문제 해결의 희망은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이들 유형의 범죄 배경에 아노미(anomie) 현상이 자리하고 있음을 기억할 때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보다 용이할 것 같다.

아노미는 흔히 ‘무(無)규범 상태’로 번역되지만, 규범이 없는 상태에선 사회 시스템 자체의 작동이 불가능한 만큼 정확한 번역이라 보기 어렵다. 아노미란 과거의 규범이 더 이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변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규범이 출현하지 않음으로써 나타나는 혼란·혼돈·불안 등을 지칭한다고 봄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오늘날 아노미적인 상황을 야기한 주범의 하나는 익명성을 기반으로 한 도시적인 생활양식이라 할 수 있다.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이 시작되기 전 한국 사회는 전형적인 이웃 공동체가 살아 있었다. 지금도 농촌에서는 조상이 누구인지부터 뉘 집 자식인지까지 소상히 알고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문을 활짝 열고 얼굴을 맞대며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층간 소음이 웬 말이며 묻지마 살인이 어디 가당하기나 한 이야기인가?

유독 모르는 사람에 대한 낯가림이 심한 한국 사회에서 이름도 모르고 뉘 집 자식인지도 모르는 익명의 개인들끼리 모여 살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면 갈등 없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공생할 수 있을까 하는 새로운 규범을 미처 만들어내지 못한 데 우리 모두의 불찰이 있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사람들끼리 이웃이 되면서 서로를 존중해 주고,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신(新)규범이 반드시 필요했음에도 말이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한국인들은 전형적인 ‘노마드(nomad·유목민)족’이라 할 미국인들보다 더욱 자주 주거를 옮긴다고 한다. 앞집 옆집 뒷집에 누가 사는지 미처 알기도 전에 또 다른 곳으로 이사를 나가는데, 이는 대도시일수록 심하고 단독주택보다 아파트일수록 빈번하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안면몰수(顔面沒收) 하는 무례함에 분노의 극단적인 폭발까지 가능한 것 아니겠는지.

관건은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일 텐데 무조건 법을 강화해서 처벌 수위를 높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지역 사회를 기반으로 한 마을 공동체의 부활을 대안으로 제안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데, 가능하다면 우리네 삶에서 빠르게 사라져간 골목을 곳곳에 만들어봄은 어떨는지. 물론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골목이 아니라, 심리적·상징적인 공간으로서의 골목을 되살리자는 이야기이다. ‘나 몰라라’ 하는 익명성 대신 여러 세대가 어울리며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고 누구인지 기억해 주는 곳으로서의 골목 말이다.

만일 익명성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시민적 무관심’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는 모르는 개인들 사이에선 일정 정도 무관심함을 보이는 것이 예절이라는 의미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물론 예의 바른 무관심과 무례한 무관심은 분명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 주며 더불어 살기 위한 성숙한 예의범절을 생활화하는 노력이 우리 모두에게 절실한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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