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113. 처녀 왕씨(王氏)

입력 2017-05-19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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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대신 독신의 삶 즐긴 고려판 골드미스

처녀 왕씨(1141~1183)는 고려시대의 독신녀이다. 아버지는 정의공(定懿公) 왕재(王梓)로, 현종 임금의 넷째 왕자인 정간왕(靖簡王)의 5세손이다. 어머니 왕씨 역시 왕가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왜 혼인을 하지 않았을까? 또 혼인을 하지 않는 삶이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있었을까? 우선 후자의 의문부터 풀어보도록 하겠다.

조선시대에는 모든 여성이 혼인을 해야만 했다. 만일 여성이 서른이 넘도록 혼인을 하지 못하고 있으면 국가에서 가장을 문책하고, 가난해 혼인을 못 할 경우는 혼인비용을 대주었다. 이처럼 국가가 혼인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유교의 기본 도덕인 삼강오륜(三綱五倫)이 부부관계로부터 시작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부부가 있어야 부자관계가, 그리고 나아가 군신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혼인은 ‘인륜의 시초’로 중시되었고, 혼인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사람은 ‘난륜(亂倫)의 무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또 부계친족제가 강화되어 조상 제사를 이을 후손이 없는, 소위 ‘대가 끊기는 것’이 가장 경계할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는 그렇지 않았다. 외손으로도 가계를 이을 수 있었으며, 불교에서도 혼인을 강요하지 않았다.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독신녀는 물론 독신자의 존재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의문, 왜 왕씨녀는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혼인을 하지 않았을까? 집이 가난해서? 아니면 불치의 병이 있다거나 혹은 외모에 문제가 있었을까? 일단 가난하지는 않았고, 병도 없었다. 또 묘지명에 따르면 그녀의 외모는 “눈 같은 피부와 꽃 같은 얼굴, 검은 머리와 아름다운 눈썹/곱고 어여쁜 자태는 하늘이 내려준 모습이었네”라고 되어 있다. 놀랍게도 900년 전 그녀의 묘지명에서 진단한 독신의 이유는 “세상에 짝이 될 만한 남자가 드물어서”이다. 마치 오늘날의 결혼 시장에서 고학력 여성과 저학력 남성이 결혼하지 못하는 꼴과 닮아 있다.

독신으로 그녀는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 우선 아버지를 섬기며 효성을 다하였다. 아버지는 그녀의 덕이 어질고 밝아 아들처럼 여겨 후사를 전하고자 하였다. 또 ‘굳고 곧은 절개는 깨끗’하였다는 데서 그녀가 독신으로 청정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조상의 제사를 잘 받들고, 형제 간에 우애가 있었다. 좌우에 부리는 사람을 신중하게 선택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였으며, 근검절약하여 필요하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모가 남긴 귀중한 보물과 재산을 조금도 허비함이 없이 삼가며 지켰다. 독신의 삶에 대해 그녀는 만족했을까? 묘지명에는 ‘세상에 짝이 될 만한 남자가 드물어서 홀로 살았지만 태연자약하였다’거나 ‘홀로 살았지만 즐거워하였다’는 등의 표현이 있어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씨는 43세가 되던 1183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처녀 왕씨의 존재는 조선시대와 또 다른 전통이 우리에게 있었음을 보여준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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