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101. 김마리아(金瑪利亞)

입력 2017-04-2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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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항일투사

1919년 남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참여한 3·1항일 만세시위의 횃불을 높이 든 사람 중 대표적인 여성은 단연 김마리아(金瑪利亞·1892~1944)다. 황해도 장연에서 일찍이 기독교를 접하고 개화된 아버지 김윤방과 어머니 김몽은의 세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소래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반드시 대학 공부까지 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상경, 언니 함라, 미렴과 같이 삼촌 집에서 공부하였다.

부모가 모두 일찍 사망하였으나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이 깊었던 삼촌 윤오, 필순, 고모 순애, 필례 등의 사랑 속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10년 정신여학교를 나와 광주 수피아여학교의 교사로 지내다 일본 히로시마(廣島)로 가 일어와 영어를 공부하였다. 귀국 후 정신여학교에서 가르치다 1915년 도쿄여자학원에 다시 유학하였다.

1917년 10월 도쿄여자유학생친목회의 회장이 되어 황에스터, 유영준 등과 함께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일본 경찰에 잡혔으나 곧 풀려난 그는 졸업을 포기하고 독립선언문 수십 장을 가지고 귀국하여 3·1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데 앞장섰다. 황해도를 중심으로 동지를 모으고 거사 자금을 모은 뒤 귀경하였다. 3월 5일 서울역 광장에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이화·진명·정신여학교 등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던 중 검거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5개월간의 옥고 끝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으나 후유증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석방된 후 9월에 애국부인회를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개편하여 회장이 되었다.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금, 지원하면서 여성들도 항일독립 투쟁에 적극 참여할 것을 독려하던 중 11월 말 다시 붙잡혔다. 3년형 판결을 받고 복역 중 병세가 악화되어 이듬해 4월 병보석으로 나왔다. 요양 중 상하이로 망명하여 애국부인회와 의정원에서 활약하였으며, 중국 난징(南京)의 진링(金陵)대학(현재 난징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23년 6월에는 미국의 파크대학 문학부에서 2년간 수학하였으며, 시카고대학에서는 도서관에서 근무하며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컬럼비아대학원에서 사회교육을, 뉴욕에서 신학 공부도 하였다. 황에스터, 박인덕 등과 함께 근화회(槿花會·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재미동포들의 애국정신을 북돋우는 한편 일제의 악랄한 식민정책을 서방 국가에 널리 알렸다.

1935년 귀국하여 원산의 마르타윌슨신학교에 재직하며 전도사업과 신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수차례의 투옥과 고문 후유증으로 1944년 순국하였다.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려졌다. 일생을 공부와 항일 민족운동에 헌신한 그의 정신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지금까지 빛을 발한다. 열정적인 꿈을 당당하게 실현하는 데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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