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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인물사전] 93. 염경애(廉瓊愛)
입력 2017-04-13 10:03
고려 최고 孝子 최루백 아내로 지극한 내조

염경애(廉瓊愛, 1100~1146), 즉 봉성현군 염씨(峯城縣君 廉氏)는 고려 중기의 귀족부인이다. 봉성(파주) 염씨로 할아버지 염한(廉漢)은 병부상서를 지냈고, 아버지 염덕방(廉德方)은 태부소경(太府少卿)을 역임하였다. 어머니 심지의(沈志義)는 의령군대부인 심씨(宜寧郡大夫人 沈氏)로 부덕이 있는 여성이었다. 염경애는 4남 2녀 중 맏딸이었는데, 아름답고 정숙할 뿐 아니라 글을 알고 대의(大義)에 밝아 말이나 행동이 남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염경애는 25세 때 수주(水州·수원) 최씨인 최루백(崔婁伯)과 혼인하였다. 시가는 대대로 수원의 향리를 지낸 집안이었다. 왜 이렇게 기우는 혼인을 한 것일까? 그 열쇠는 최루백에게 있다. 최루백은 고려를 대표하는 효자였다. 15세에 아버지 최상저(崔尙翥)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최루백은 도끼를 둘러메고 산을 뒤져 호랑이를 찾아내 죽였다. 그러고는 삼년상을 치른 뒤 과거준비를 해 급제하였다. 즉 최루백은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진 전도유망한 청년’이었기에 좋은 집안의 사위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혼인을 한 염경애는 홀시어머니의 ‘뜻을 미리 알아 받들며’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또 시아버지의 제례에 정성을 다하였다. 평소 부지런히 길쌈을 하여 옷을 만들어 두었다가 제삿날이 되면 영전에 바쳤다. 또 버선을 많이 만들어 두었다가 절에 재(齋)를 올리러 갈 때면 승려들에게 시주하였다. 최루백은 그녀의 묘지명을 쓰면서 특히 이 일을 가장 잊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일가친척의 길흉 경조사에도 늘 정성을 다하여 모든 사람이 훌륭하다고 여겼다.

염경애는 남편과 자식들이 오직 관직생활과 공부에만 전념하고, 집안의 의식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재간이 없어 집안이 가난하다며 안타까워하였다. 1145년 최루백이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로 승진하였다.

그녀가 이제 가난을 면하겠다며 좋아하자 남편이 간관(諫官)은 녹만 먹는 자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당신이 조정에서 임금에게 옳음을 간한다면, 자신은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베옷을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아가도’ 기쁘겠다고 하였다.

훌륭한 아내이며 며느리, 어머니였던 그녀는 1146년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최루백은 계속 승진하였고, 그녀가 낳은 4남 2녀 중 아들은 한 명이 승려가 되고, 세 명은 관리가 되었다. 이로써 그녀의 가정은 나라에서 많은 녹을 받게 되었으나 최루백은 집안의 의식이 오히려 그녀가 고생하며 살림을 꾸릴 때만 못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고는 아내의 죽음을 맞아 “함께 무덤에 묻히지 못해 애통하다”며 절절한 심정으로 묘지명을 썼다.

그러나 아내의 빈자리가 너무 컸던 탓일까? 최루백은 이후 유씨(柳氏) 부인과 재혼하여 100세가 넘도록 수를 누렸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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