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새해 복(福) 짓기

입력 2017-01-11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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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왔는가/미처 맞이할 겨를도 없이 불쑥/들이닥친 길손처럼 새해는 와 버렸는가/어제 방구석에 쌓인 먼지도 그대로/내 서가의 해방기념시집의 찢어진 표지/그 위를 번져 가는 곰팡도 아직 못 쓸고 있는데/새해는 불현듯 와 버렸는가”(이동순 ‘새롭지 않은 새해의 시 1’ 중)

준비 없이 다시 한 살이 보태졌다. 시간이 내 편인 것 같진 않지만 적(敵)은 더더욱 아니기에 또다시 최선을 다해 살아볼 생각이다. 이맘때 중요한 게 바로 덕담(德談)이다. 가까운 이들과 덕담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해를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덕담에는 상대방이 잘되기를,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그래서 행복하기를 비는 진솔한 마음이 담겨 있다.

몇 년 전부터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라는 덕담을 가장 많이 하고 있다. 몇몇 지인들은 “복을 받지 말고 지으라고?” 하며 의아해한다. 복을 지으라는 건, 받으라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복을 바란다는 의미다(지은 만큼 받을 수 있기에!). 주역에 나오는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은 이를 잘 말해준다. 착한 일을 계속하면 복이 자신뿐만 아니라 자손에까지도 미친다는 가르침이다.

‘짓다(명사형 ‘지음’)’는 내가 좋아하는 말 중 하나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들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을 짓는다. 이렇게 삶의 바탕이 이뤄지면 농사를 짓고 시(詩)를 짓고 노래를 짓는다. 어디 이뿐인가.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자연스럽게 웃음을 짓고 눈물을 짓고 한숨을 짓고 표정도 짓는다. 또 외로울 땐 짝을 짓고, 아기가 태어나면 이름을 짓고, 아프거나 기운이 떨어지면 약을 짓는다. 물론 무리를 짓다, 죄를 짓다처럼 부정적인 의미로도 쓴다.

짓다와 만들다를 섞어 쓰는 이들이 있다. 위의 문장들에 ‘짓다’ 대신 ‘만들다’를 넣으면 어떨까? 밥을 만들고 시를 만들고 웃음을 만들고 짝을 만들고…. 매우 어색하다. 노력이나 기술 등을 들여 사물을 이루는 ‘만들다’와 달리 ‘짓다’는 사람이 마음과 손을 써 이룰 때 적합한 말이다. ‘만들다’가 ‘짓다’의 말맛을 대체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짓다’는 띄어쓰기에 유의해야 한다. 갈래짓다, 결론짓다, 결말짓다, 결정짓다, 관련짓다, 규정짓다, 농사짓다, 눈물짓다, 매듭짓다, 반짓다, 종결짓다, 죄짓다, 줄짓다, 짝짓다, 척(隻)짓다, 축(軸)짓다, 특징짓다, 편(片)짓다, 한숨짓다, 환(丸)짓다, 희짓다 등 한 단어로 굳어진 합성어가 많아서다. 이외의 경우는 목적어 ‘무엇을(를)’과 서술어 ‘짓다’를 띄어 적는다. 가장 흔한 ‘밥짓다’나 ‘옷짓다’가 한 단어로 인정받지 못한 게 영 아쉽다.

‘짓다’는 ‘짓고, 지어, 지으니, 짓는’ 등으로 활용한다. 눈치를 챘겠지만 ‘짓’의 끝소리 ‘ㅅ’은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 앞에선 탈락한다. 시옷불규칙활용이다. 뒤잇다가 뒤이어, 젓다가 저어, 낫다가 나아로 바뀌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다산 정약용은 ‘중수만일암기(重修挽日菴記)’에 “집을 지을 때에 누에는 창자에서 실을 뽑아내고, 제비는 침을 뱉어 진흙을 반죽하며, 까치는 열심히 풀이나 지푸라기를 물어 나르느라 입이 헐고 꼬리가 빠져도 지칠 줄을 모른다.(중략) 우리 인간의 집 짓는 일도 이런 하찮은 짐승들과 다를 바가 없다” 고 썼다. 맞다! 곤충도 새도 사람도 모두 집을 짓는 데 최선을 다한다. 집은 삶의 기본이며, 그 안에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서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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