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칼럼] “시어머님께 얼마나 자주 전화해야 하나요?”

입력 2015-09-24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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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올 가을 학기 대학원에서 ‘가족연구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수업 시간에 학생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다. 주로 이삼십 대 여성들이 자주 애용하는 인터넷 커뮤니티 중 ‘레몬 테라스’란 곳이 있다고 한다. 이곳에 가장 빈번히 올라오는 질문 중 하나는 “시어머님께 얼마나 자주 전화해야 하나요?”란다. 한데 이 질문에 대한 댓글이 “시댁에서 얼마 받으셨어요?”로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듣곤,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실제로 서울 강남에 전세를 얻어주었다면 1주일에 1번 정도, 강북에 월세를 마련해주었다면 1달에 1번 정도, 이런 식의 댓글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것이다. 하기야 이미 오래전에 강남 어딘가엔 ‘시부모님 호텔’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새롭다. 추석이나 설 명절에 시댁 어르신들께서 아들 손주 보러 올라오시면, 제법 성공한 아들 내외는 부모님을 자신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모시지 않고 근처 작은 호텔에 모신다는 것이다.

물론 며느리 입장에서 시어머님께 얼마나 자주 문안을 드려야 할지는 예나 지금이나 만만치 않은 문제일 게다. 그래도 예전엔 시부모님에 대한 예의도 차리고 며느리로서의 도리도 생각해서, 행여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건 아닌지 죄송한 마음도 느끼고 용돈 하나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함을 미안해하곤 했었다.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우리네 가족관계가 입에 담기조차 민망할 만큼 격(格)을 잃어버리게 된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어쩌면 인터넷 커뮤니티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공간이기에 보다 적나라하게 자신의 속내를 거침없이 표현할 수 있는 만큼, 얼굴을 맞대고선 감히 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오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온라인에선 어차피 상대방의 느낌을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상대방의 상태를 배려할 필요도 없기에, 때론 필요 이상의 과장된 표현도 서슴지 않을 것이요, 자신의 욕망이나 열망을 시니컬하게 표출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댁과의 관계조차 합리성을 가장한 천박한 물질주의에 의해 재단되고 있음은 안타까움을 넘어 서글프기만 하다. 부모로부터 상속받을 것이 없는 자녀들 중엔 부모로부터 완벽한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 요즘 대세요, 극단적 경우엔 연(緣)을 끊기도 한다는데야.

자녀들에게 상속할 재산을 다량(多量) 보유하고 있는 상류층 부모들 쪽의 방어 전략 또한 “웃프기만”하다. 이분들도 한 유선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줄 듯 줄 듯 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안 주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니 말이다. “자식들에게 다 주면 굶어 죽고, 안 주면 맞아 죽고, 반만 주면 시달려 죽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요즘 부모님 세대의 금과옥조가 되었다지 않는가.

요즘 한국의 가족 및 친족관계는 일찍이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켕이 주창했던 아노미(anomie)적 상황을 전형적으로 드러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노미는 흔히 무규범 상태로 알려져 왔지만, 사회는 규범 없인 작동이 불가능하기에 적절한 번역은 아닌 듯 싶다. 아노미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예전 규범은 그 의미와 통제력을 상실했는데 새로운 규범이 출현하지 않은 과도기적 상태를 뜻한다.

한국의 가족 및 친족관계를 지배해온 부계혈연 중심 가부장제 규범은 이제 수명을 다했는데, 변화의 흐름에 걸맞은 새로운 규범과 도덕이 부재(不在)한 상황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물질주의의 비루함과 이기주의의 천박함이 물밀 듯 밀려오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이제 우리네 친족관계도 부계제로부터 양계제로 이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면, 양계제에 부응하는 규범과 가치를 만들어내고 양계제적 문화를 뿌리내리도록 함이 순리일 것이다. 무늬만 부계제를 고수하면서 몸 따로 마음 따로인 채, 명절만 돌아오면 일단 한 방향으로 민족의 대이동을 감행하기보다, 오늘 우리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솔직하면서도 성숙한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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